[음반평] 에릭 클랩튼 "Pilgrim"

시대조류에 밀려나지 않고 여전한 인기를 누리는 팝 뮤지션을 꼽는다면 단연 에릭 클랩튼과 엘튼 존이다. 클랩튼은 존과 달리 음악적 실험까지 심심치 않게 수반한다는 점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그런 클랩튼이 새 앨범 「Pilgrim」을 냈다. 지난 96년의 히트작 「Change the World」의 선율이 아직도 귀에 선한데 틈을 주지 않고 신보가 등장한 것이다. 작년에 「TDF」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소리소문없이 만들기도 했지만 역시 대중의 눈과 귀는 그의 메인스트림 타이틀 쪽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는 더이상 기다릴 것도 없이 「준비된」 히트곡이 나왔다. 한국의 IMF시대를 예견했을리 없겠지만 첫 수록곡 「My Father’s Eyes」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한 곡인데, 국내 대중매체들은 이 곡을 실직한 가장들을 위한 한국형 맞춤음악으로 못박을 정도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클랩튼의 히트곡을 통해 본 그의 시점변화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여인(Layla)과 마약(Cocaine)에 심취해 있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불의의 사고로 먼저 숨진 아들에게 노래를 헌정(Tears in Heaven)하더니 이제는 아버지를 생각(My Father’s Eyes)한다. 어찌보면 한 남성이 철이 드는 과정을 보는 것만 같다.

클랩튼의 음악적 뿌리를 록으로 아는 팬들도 많겠지만 정확히 말해 블루스 록이다. 「슬로우 핸드」라는 그의 별명도 블루스적인 기타주법에서 유래했다. 요즘은 주로 블루스 쪽에 기반을 둔 곡들을 만들고 있을 정도다.

이번 앨범도 예외는 아니어서 블루스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히트작을 내기 위한 요소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곡의 선정이나 내용이 대중들의 입맛에 잘 들어맞으면서도 음악성을 포기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등 이제 그를 「기타의 달인」이 아닌 「대중음악의 달인」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

그의 음색이나 노래실력은 「가수급」으로 보기에 무리일 듯 하지만 그 또한 클랩튼표 음악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My Father’s Eyes」는 누가 들어도 좋아할 만한 곡이지만 기타를 퉁기는 손이 아직 굳지않았음을 보여주는 「River of Tears」도 인상적이다.

앨범 전체 분위기가 블루스 기조에 포크, 가스펠도 섞여 있지만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는 매끄러운 진행을 보이고 있다. 다만 「My Father’s Eyes」의 몇 소절이 스티브 원더의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를 연상시킨다면 필자의 지나친 오해일까.

<박미아, 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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