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가전업체, STB시장 "파상공세"

디지털 위성TV방송, 지상파TV방송, 케이블TV방송 등의 수신장치인 세트톱박스(STB)를 둘러싸고 일본의 주요 가전업체들간 주도권 다툼이 달아오르고 있다. TV방송 디지털화에서 앞서고 있는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올들어 STB 수요가 본격 형성됨에 따라 마쓰시타전기산업.소니.파이어니어 등이 이 시장공략에 적극 나서며 주도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STB는 디지털화에 따른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주문형비디오(VOD).전자상거래(EC).홈뱅킹 등 다양한 서비스를 실현시켜 가정내 정보통신 구현의 핵심 미디어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저조한 보급으로 업계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를 능가하는 초대형 가전이 될 것으로 업계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업체간 경쟁은 단순한 STB시장 주도권 다툼에 머물지 않고 가전업계의 판도까지 뒤바꾸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높아 주목된다.

STB 시장경쟁은 올 여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 지상파TV방송에 착수하는 영국에서 특히 뜨겁다.

최근 영국의 디지털 지상파방송사인 브리티시디지털브로드캐스팅(BDB)은 독자방식을 채용한 STB를 소니와 도시바를 비롯해 네덜란드의 필립스, 핀란드의 노키아, 독일의 그룬디히, 영국의 페스 등 6개사에 발주하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앞서 오스트레일리아 미디어업체인 뉴스 산하의 영국 위성방송사 B스카이B는 프랑스의 유료방송사 카날플뤼스가 개발한 STB를 채택하기로 하고, 그 공급업체로 마쓰시타를 선정했다.

이로써 영국의 디지털TV방송용 단말기시장은 위성방송용과 지상파방송용으로 일단 나눠졌으나 이 구도는 조만간 깨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국 정부가 「시청자 비용부담 최소화」 원칙을 내세워 위성방송과 지상파방송을 동일한 STB로 모두 볼 수 있도록 「단일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TV방송용 STB의 표준화를 둘러싸고 위성방송과 지상파방송, 구체적으로는 세계 가전업계의 맹주를 다투는 마쓰시타와 소니간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초대형 가전제품 부상 영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케이블TV용 STB시장을 둘러싸고 경쟁이 뜨겁다. 위성방송에 비해 케이블TV 보급이 활발한 데다 최근 급진전되고 있는 디지털화로 신규 수요까지 기대되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은 파이어니어. 지난 20년간 아날로그방식 케이블TV용 STB를 생산해 온 이 회사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케이블TV업계 2위인 타임워너로부터 디지털 STB를 한꺼번에 약 20만대나 수주하는 쾌거를 올리는 등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

후발업체로는 케이블TV용 STB에 처음 뛰어든 소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특히 소니는 단숨에 후발의 단점을 극복하는 동시에 사업기반도 다지기 위해 관련업체와의 자본제휴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미 그 일환으로 올 초 미국의 케이블TV용 STB 최대업체인 넥스트레벨(구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 약 2백40억엔을 출자해 이 회사 주식 5%를 취득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파이어니어도 「자금력 있는 기업으로서 짧은 시간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라며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넥스트레벨은 케이블TV 최대업체인 텔레커뮤니케이션스 등과 디지털 STB의 대량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파이어니어에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다.

따라서 소니가 이 넥스트레벨을 등에 업게 될 경우 선발 파이어니어의 입지는 크게 흔들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라 두 업체간 주도권 다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소니와 파이어니어는 프랑스의 위성방송 STB 시장에서도 경합하고 있다. 카날플뤼스가 서비스중인 위성방송의 STB 공급업체로 두 업체가 선정돼 있기 때문이다.

STB 주도권을 놓고는 이처럼 마쓰시타, 소니, 파이어니어 등 일본의 주요 가전업체가 미국과 유럽 일부지역에서 경합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주도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은 STB시장의 유망성 때문이다. 현재 이들은 이 사업을 통해 큰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방송의 보급 저조로 방송사업자가 시청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STB가 주로 보급돼 제조업체에 돌아오는 마진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방송 보급이 크게 늘면 그에 따른 양산효과도 생기고 가격도 떨어져 결과적으로 제조업체는 자사 브랜드로 직접 판매하며 큰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기대가 실현될 가능성은 높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방송 디지털화가 일본과 유럽의 다른 지역은 물론 아시아지역 국가들로까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어 2000년을 전후해 STB시장은 급팽창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STB는 가정내 멀티미디어화를 구현시킬 첨병으로 주목되고 있다. PC의 경우 사용의 어려움, 불편 등으로 가정내 활용도가 실제로는 낮지만 가전제품으로 출발한 STB는 리모컨으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어 TV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디지털방송 보급을 전제로 하지만 STB는 분명 대형 가전으로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일본 가전업체들이 STB에 21세기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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