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콤의 발족을 앞두고 우리라 정보통신업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누가 사장이 될 것이냐는 점이었다. 후보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으로 압축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성기수박사와 이용태박사가 그 대상이었다.
성기수는 소문난 수재였다. 58년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그는 공사 교관시절인 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2년 동안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최단기간의 박사학위 취득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63년에 귀국하여 공사 교관과 서울대 대학원 강사, 한국경제개발협회 조사역을 지낸 다음, 67년 전자계산실장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입사하여 이 연구소의 전산개발센터 부장, 시스템연구담당 부소장을 거쳐 시스템공학센터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경제기획원의 정부예산업무와 체신부의 전화요금업무, 서울시의 재산세업무를 비롯한 각종 정부 업무의 전산화는 물론 민간기업 업무의 전산화까지 맡아 주로 IBM대형 컴퓨터를 이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엄청난 실적을 쌓았다. 한 마디로 황무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 컴퓨터 소프트웨어업계에서 하나의 큰 성을 쌓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성기수가 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용태는 국산컴퓨터의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57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이용태는 대학 시절부터 학원 강사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학비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생활까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당시 장안의 유명한 EMI학원에서 이지흠이란 가명의 수학강사로 이름을 떨쳤다. 66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69년 유타대학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얻은 다음 70년 KIST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 후 이 연구소의 전자계산기국산화연구실장, 소형전자계산기 연구실장을 거쳐 78년 신설된 전자기술연구소의 전산개발담당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연구소에 근무하면서도 친지들과 대일학원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다.
KIST의 전자계산기국산화연구실장으로 근무할 때인 70년대 중반 그는 국산컴퓨터를 개발해 낼 터이니 연구원 100명을 내놓으라고 정부를 향해 외치고 다닌 적이 있었다.
"71년 인텔(intel)에서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나에겐 굉장한 충격을 주었어요. 그 전까지는 컴퓨터를 국산화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당시의 컴퓨터는 트랜지스터로 만들었는데, 컴퓨터 상자 하나에 트랜지스터가 수백만개 들어앉아 있어요. 따라서 그많은 것을 설계하고 땜질하고 엮어낸다는 것은 우리나라 수준으로는 생각하기어려운 일이였죠. 그런데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것은 칩 하나에 컴퓨터 기능을 집약해 놓은 거니까 우리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거죠. 그런데도 컴퓨터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무시했어요. 당시에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로는 4비트 컴퓨터밖에 안되니까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거였죠. 그러나 나는 기술 발전추세로 보아 8비트, 16비트로 발전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KIST내부에서 연구원 10명을 데리고 나와 전자계산기국산화 연구실을 만들어 놓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사서 칩에 주변기기를 달고 껍데기를 씌워 컴퓨터 국산화작업을 시작하면서 정부에 대고 연구원 100명만 주면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마이크로컴퓨터 생산국이 될 수 있다고 외쳤죠"
그러나 정부의 어느 부처에서도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들 그의 말을 허황된 말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국산 컴퓨터 개발사업에의 참여를 권유했지만 그들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다만 평소 기술개발에 관심이 많았던 OB맥주의 정수창사장이 100명의 연구원을 확보해 주겠다고 나섰으나 연구원의 채용 방식에 대한 KIST와의 이견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시절에도 컴퓨터의 개발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으나 정부의 무관심으로 그 연구소의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자, 80년 몇몇의 컴퓨터 전문가들을 모아 삼보전자 엔지니어링을 설립했고, 이어서 큐닉스.엘렉스.KSI 등의 모험기업을 설립하여 컴퓨터의 생산.판매는 물론 연구개발업무까지 담당함으로써 연구원 생활에서 기업가로 변신했다.
성기수와 이漣태, 두 사람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과학자들이 흔히 그렇듯 조직적이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성기수는 공사의 구분이 분명한 실용주의자였다. 전형적인 기술자로서 목적 달성을 위해 타협할 줄 모르던 그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딸 때마다 관료들과 상대해야 하는 연구소 생활에는 적응력이 부족하다는 평도 들었으나 자기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팜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탄탄히 구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이용태는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사람으로 경영 능력이 있었다. 그는 KIST간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다. 그는 항상 남보다 몇 발 앞서고 있기 때문에 모험기업인 컴퓨터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두 대가의 사이가 아주 나빴다. 어떤 사람은 그들 사이를 견원지간이라고까지 혹평했다. 그 이유를 어떤 사람은 "가치관의 차이"로 돌렸고, 어떤 사람은 "스케일의 차이"라 했다. 아무튼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우리나라 컴퓨터계의 양대 산맥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사건건 의견의 대립을 보였다.
체신부 실무자들이 올린 데이콤 사장 후보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데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 임명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오명차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당시는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었어요. 컴퓨터나 데이터통신에 대해 책임을 맡길 만한 사람은 성기수박사와 이용태박사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까요. 둘 중 한사람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그런데 두사람 다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낸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건의할 수 있는 입장이었죠. 그때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이용태박사의 경우 순수한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면에서 공박이 나오는가 하면 명색이 회사를 맡을 사장인데 돈벌이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맡아야지 순수한 학자가 맡아서야 되겠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고, 성기수박사의 경우 한 길을 걸어온 학자적인 사람으로서 바람직하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사업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장을 맡기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반론도 있었죠. 그래서 여러 사람이 상의하고 장관께 건의드리는 과정에서 데이콤은 기업이니만큼 사업수완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서 이용태 박사로 결정됐던 겁니다"
당사자인 이용태는 그 무렵 엉뚱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벤처캐피털회사의 설립을 추진해왔는데 실제로 모금목표액 1천만달러에서 8백만달러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에 앞서 81년 6월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자리를 물러난 이용태는 사임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의 정보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작은 벤처기업이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컴퓨터 관련회사 1백개를 설립하겠다. 컴퓨터회사 1백개가 만들어지면 우리나라에서도 정보산업의 기반이 제대로 갖춰질 것이다. 왜 하필 1백개냐하면 정보산업이어서 대단히 위험도가 높다. 따라서 여러개를 만들어 놓으면 그중에 사는 회사도 있고 죽는 회사도 있는데 사는 회사는 굉장히 빨리 성장하기 때문에 죽는 회사까지 커버하게 된다.
여러 개의 회사를 만들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각각의 회사는 능력있는 엔지니어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엔지니어가 훌륭하면 회사를 하나씩 만들어 줘야 한다. 거대한 장치산업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지만 컴퓨터는 거대한 장치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이러한 나름대로의 논리에 따라 실제로 회사를 하나씩 설립해 나갔다. 1인당1천만원씩 갹출하여 10명이 모이면 회사 하나를 설립하되 연구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끌어들여 운영을 맡기는 작전을 썼다. 그렇게 해서 80년 7월 맨 처음으로 설립한 회사가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었다.
KIST의 강진구, 동양전산의 이정희, 금성사의 김종길 등을 끌여들여 설립했는데, 그것이 국내 최초의 PC생산회사였다.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큐닉스, 엘렉스, KSI 등의 컴퓨터 관련 모험기업을 설립해 나갔다. 같은 컴퓨터회사였지만 각각의 회사는 전문분야가 달랐는데 삼보는 컴퓨터의 생산, 큐닉스는 R&D, 엘렉스는 판매, 그리고 KSI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전문회사였다.
이용태는 그 중 3개 회사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이름만 걸어 놓았을 뿐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계속 신설 회사를 늘려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들 4개 회사중 삼보전자엔지니어링과 엘렉스, KSI를 84년 1월에 합병하여 삼보컴퓨터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모험기업의 설립과 관련하여 그가 추진한 또 하나의 사업은 벤처캐피털회사의 설립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설립은 1억원 정도의 투자로 시작할 수 있는 모험기업과는 달리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므로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서 부총리 자문관직을 맡고 있던 김기환의 소개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벤처 캐피털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게 기술인데, 기술을 얻으려면 과거처럼 기술도입이나 기술개발 두가지 기둥으로는 안됩니다. 기술도입이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 선진국이 후진국에 후진 기술을 주는 거지 선진국이 한창 쓰고 있는 첨단기술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보산업 같은 첨단산업을 육성하려면 기술도입으로는 안되는 겁니다. 또 자체개발을 한다는 것은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흔히들 이 두가지 기둥만 생각하는데 세번째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세 번째 기둥이 뭐냐 하면, 벤처 캐피털을 모아 미국으로 들고 나가는 겁니다. 미국에 가서 "젊은 수재들아, 여기 돈이 있으니까 오기만 하면 돈을 내주겠다" 하고 간판을 내걸면 한달에 3백건 정도의 신청이 들어옵니다. 정보통신분야의 날고 기는 재주꾼들이 오는 거죠"
그 당시는 벤처 캐피털회사의 설립이 미국에서도 초창기였다. 그런데도 벤처캐피털회사의 설립계획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청와대 김재익수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8개의 단자회사에서 1백만달러씩 8백만달러을 모을 수 있었다. 이제 목표한 1천만달러을 채우면 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오명 차관으로부터 데이콤 사장 자리가 제의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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