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시장의 명암이 크게 엇갈린 해였다.
국내 제일의 산업으로 꼽혔던 반도체의 위상이 D램 가격 폭락으로 급전직하한 반면 디스플레이산업은 생산능력 확대와 수요 급증세에 힘입어 제2의 반도체로 급부상해 대조를 보였다.
반도체
올 한해 반도체업계의 최대 이슈는 역시 D램 가격 급락이었다. 지난해말부터 본격화된 D램 가격 하락은 세계 반도체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고 지난해까지 매년 50% 이상씩 성장세를 보이며 초호황세를 구가해온 국내 반도체산업도 1년만에 마이너스성장으로 돌아섰다.
반도체 시장전문조사업체인 데이터퀘스트는 10월 중순에 발표한 추계 전망치를 통해 96년 반도체시장은 95년보다 오히려 9%정도 감소한 1천3백70억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7.6%의 저성장을 예상한 지난 춘계 전망치보다 무려 16.6%나 줄어든 것이다.
최근 발표된 96년 국내 반도체 수출 수정목표치도 당초 목표의 거의 절반인 1백80억달러로 내려앉았다. 이 중 일관가공(FAB) 반도체가 1백20억달러로 전년보다 18% 줄었고 그간 효자대우를 받았던 D램은 1백억달러로 무려 20%이상 감소할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반면 비메모리와 조립은 각각 9억4천만달러와 60억달러로 전년보다 오히려 39%와 34%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도체수출 감소의 주원인은 D램 가격폭락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개당 50달러를 호가하던 16MD램 가격이 5분의 1수준인 10달러선으로 급락한 것은 「반도체 공황」으로 불렸던 지난 85년과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할 정도다.
D램 가격급락은 산업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반도체 쇼크」로 인한 수출차질이 예상외로 커지자 대책마련에 연일 비상을 걸었고 한, 일 반도체업체들이 전에없이 공동으로 자발적인 감산조치에 돌입하기도 했다. 또한 그간 그룹내 자금줄 역할을 했던 반도체사업부가 올들어서는 타사업부보다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대적인 원가절감운동을 펴는 등 불과 1년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광경들이 연출됐다.
D램 가격급락은 반도체 3사의 매출은 물론 수익구조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삼성전자의 올해 반도체 매출은 6조3천억원,이익은 4천억원 수준에 머무르고 현대전자와 LG반도체도 매출과 이익이 각각 2조3천8백억원, 8백억원과 2조3천5백억원, 1천억원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같은 D램시장 위축이 가져온 파장 가운데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메모리 호황에 취해있던 반도체업체들이 이번 가격급락으로 D램의 불안정한 시장구조를 여실히 깨달아 비메모리분야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반도체 3사는 ASIC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비메모리 육성계획을 세우고 집중투자에 들어갔고 아남그룹은 TI와 손잡고 디지털시그널 프로세서(DSP)시장에 본격 참여하는 등 사실상의 국내 비메모리산업의 원년으로 기억될만큼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았다.
96년은 또한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해외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해이기도 하다. 삼성이 오스틴(美)에,현대가 유진(美)과 스코틀랜드(英)에 진출키로 한데 이어 LG반도체도 웨일스(英)에 대단위 투자를 결정,국내 반도체 3사 모두가 해외생산기지를 보유케 됐다. 이로써 국내 반도체업체들은 수출시장 대응력 제고를 위한 글로벌시대를 열고 미, 일 등 반도체 열강과 현지시장에서 어깨를 나란히하게 됐다.
가격 한파 속에서도 희소식은 있었다. 4.4분기들어 LG반도체가 4기가D램을 제조할 수 있는 핵심 X레이 노광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고,삼성전자는 10억개의 셀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1기가 풀워킹다이를 세계 첫 개발하는 등 국내 메모리 기술의 우수성을 재입증하는 낭보가 연이었다. 세계 반도체시장 구도에 새로운 변화를 줄 만한 사건도 적지 않았다. 우선 「미, 일반도체협정」 폐지로 탄생된 민간기구인 세계반도체협의회(WSC)창설 움직임은 향후 미, 일, 한국, 유럽의 반도체시장 주도권 다툼의 최대 변수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만의 D램생산 본격화 등도 올해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반도체 장비 및 재료시장은 신장률면에서는 소자시장의 위축으로 당초 예상에는 못미쳤지만 품질대응력과 자급률면에서 크게 약진했다.
국내 장비시장은 전공정 장비 23억7천만달러,검사 및 테스트장비 11억3천만달러,조립 장비 2억9천만달러,관련장치 2억8천만달러 등 총 41억5천만달러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국내 생산장비의 공급은 전공정 1억달러,조립공정 1억4천달러,검사 및 측정 1억3천만달러,관련장치 1억3천만달러 등 총 5억달러로 전체 수요의 약 12%에 이를 전망이다.
재료시장은 지난해(20억4천4백만달러)보다 20%정도 늘어난 24억1천7백만달러에 이르고 국산공급은 웨이퍼와 리드프레임의 생산확대에 힘입어 총 10억8천7백만달러를 넘어서 국산화율도 전년보다 7% 이상 증가한 45%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디스플레이
96년은 한국 디스플레이산업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 한해로 기록된다. 영원한 2위로만 머물 것으로 예상됐던 브라운관분야에서 마침내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1위의 위치를 굳혔으며 21세기 주력제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액정디스플레이(LCD) 등 평판분야의 발전도 괄목할만 했다.
브라운관 3사는 올 한해동안 총 6천62만개의 브라운관을 판매,지난해(5천2백51만개)에 비해 15%가 넘는 양적 성장을 기록할 전망이다. 이는 세계시장의 30%에 해당해 더이상 경쟁상대가 없는 확실한 1위를 굳힌 셈이다. 다만 성장률에서는 지난해 40%의 기록적인 성장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는 96년 세계브라운관 시장이 95년 공급부족사태에서 공급과잉으로 급격히 반전됐기 때문이다. 국내업계는 그러나 공급과잉이라는 악조건을 해외진출이라는 적극적인 공세로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삼성전관, LG전자, 오리온전기 등 브라운관 3사는 96년들어 그동안의 국내 생산체제에서 과감히 글로벌경영체제로 전환,세계 곳곳에 현지공장을 설립하는 등 생산 및 경영분야에서도 과감한 변신을 서둘렀다.
평판디스플레이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지난 95년 초와 말에 박막트랜지스터 액정디스플레이(TFT LCD) 양산을 개시한데 이어 96년 말에는 현대전자도 가세,국내 재벌 3사간 트로이카체제가 출범되는 변화를 겪었다. 삼성과 LG는 12.1인치 제품의 공급부족과 끝없이 떨어지던 가격이 회복세를 보임에 따라 하반기부터 각각 기흥과 구미에 있는 제1공장에서 TFT LCD용 기판유리를 최대생산능력인 월 2만∼2만5천장을 투입,모듈을 한장이라도 더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10월 말부터 기흥의 제2공장을 완공,월 5천장의 유리기판을 투입하는 초기가동체제에 돌입했으며 현대전자도 이천의 제1공장에 지난 11월부터 월 1만장의 기판유리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연말에 양산을 개시한 현대전자를 제외하고도 삼성, LG 양사는 올해 TFT LCD부문에서 총 5억달러(4천억원) 매출에 3억5천만달러(2천8백억원)의 수출을 달성할 전망이다. 양사의 이같은 올해 매출은 지난해 STN LCD를 포함한 컬러 LCD 생산 및 수출실적의 약 2배에 해당한다.
TFT LCD업계는 특히 올해의 생산 및 판매호조로 사업이 안정기조를 찾음에 따라 내년부터 제2 또는 제3공장의 건설에 나설 예정이어서 브라운관에 이어 평판분야에서도 급속한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김경묵,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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