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5대 국가기간전산망은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망, 공안망 등을 말한다. 5대 전산망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5공화국 초기인 82년부터 추진돼 86년 12월 31일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되기까지 4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87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이 사업은 컴퓨터 수요의 창출, 체계적인 정보산업 육성정책의 필요성,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구현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입안과정에 참여했던 소수 관계자만이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만큼 사업 자체에 도박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또 도처에 극복해야 할 무리수나 난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훗날 사람들이 『이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특수한 정치적(이를테면 5공화국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바꿔 말하면 이 계획의 입안이나 사업 추진과정에서 그만큼 의혹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은 이 5대 전산망사업 추진을 계기로 비로소 독립적인 분야로 면모를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어느 분야에서도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한 시대가 거듭나는 분수령은 있게 마련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첫 회를 내보냈던 「컴퓨터 파노라마」는 당초 여기까지를 염두에 두고 1년여 동안 연재해 왔다. 이제 5대 전산망계획의 재조명과정을 통해 컴퓨터 파노라마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도 이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쉽게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본란 44회까지 3회 동안 몇 개의 작은 제목으로 5대 전산망에 대한 얘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전야」
85년 가을 정기국회에는 정보산업과 관련된 3건의 입법안이 상정돼 있었다. 국무회의가 의결한 「과학기술혁신 기본법안」과 「공업발전법안」 그리고 여당인 민정당 안으로 제출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 등이 그것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과기처, 공업발전법안은 상공부와 각각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산망 보급 확장법안은 당연히 체신부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사실 이 법안은 애당초 체신부가 마련하려 했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이 그 모태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처음부터 관련부처 사이에서 「체신부의 정보산업 독점관리화」라는 의도로 해석되면서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이에 민정당은 그 내용은 그대로 받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으로 바꿔 여당안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민정당은 때마침 85년 초 치른 12대 총선에서 전산망 보급 관련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기존 과학기술진흥법과 기술개발촉진법을 폐기하는 대신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구법들이 산업 측면에 역점을 두었다면 새 법안은 소프트웨어와 같은 기초기술 진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원래는 「정보산업의 육성」과 같은 문구가 일부 조항에 명시돼 있었으나 관계부처간 협의과정에서 삭제됐다. 아무튼 이 법안의 골자는 과기처로 하여금 산업발전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근거를 상당부분 축소시켜 놓은 것이었다.
공업발전법안은 기계, 전자, 철강 등 7개나 되던 기존의 육성법을 통폐합한 것으로 공업의 균형발전, 업종합리화, 공업발전기금의 설치 등이 골자였다. 이 법안 역시 처음에는 상공부의 야심을 그대로 반영, 정보산업정책 관할조항을 잔뜩 명시했다가 다른 법과 지나치게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에 따라 여러번의 자구수정을 거친 상태였다.
문제는 민정당이 제출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이었다. 국회에 제출된 3개 법안 가운데 유일하게 조항마다 「정보산업」이니 「전산망」이니 하는 문구들이 횡행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전산망(통신망)과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균형발전을 통해 정보산업을 육성하고 정보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전기통신사업자의 전산망사업 참여, 전산망 소요기기와 기술의 국산화, 호환성 확보를 위한 표준화사업 전문인력 양성 등 사실상 국가 차원의 정보산업 육성 등이 명시돼 있었다. 폐기 직전에 있던 체신부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을 20여일 만에 이름만 바꿔 재포장한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 안을 여당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공청회가 열리는 때를 전후해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설이 나돌았다.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발한 곳은 상공부였다. 당시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은 체신부가 여당을 업고 내놓은 법이었죠. 상공부에서는 정보산업을 공업발전법에 의해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해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신부가 이를 가로막고 오히려 모든 것을 독점하겠다는 상황이 돼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상공부 입장에서는 부처의 특성상 정보산업 육성정책 전체를 상징하는 전산망사업을 펼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공업발전법 입안취지에서도 보여지듯이 상공부는 하드웨어를 정책수단으로 정보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도였다.
입장이 아이러니하게 돼버린 것은 과기처 쪽이었다. 여태까지 정보산업정책을 주도해 온 과기처로서는 민정당의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상공부보다 더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수순일 터였다. 그러나 과기처는 어찌된 일인지 시종 어정쩡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실무자 사이에서는 분명 민정당 안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공식입장은 언제나 중도였다.
왜 그랬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단서는 85년 2월 18일 개각때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이동한 김성진 장관이 쥐고 있었다.
체신부 재직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소신은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추세에 따라 정보산업 육성은 체신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해 오던 김 장관이었다. 그러던 그가 자리를 바꿔 해당업무 흡수대상이던 과기처 수장으로 옮겨 앉은 것이었다.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이던 L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김 장관은 부임 초기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의욕을 보였죠. 그러나 이 계획은 전임 장관 때 거의 마무리된 것이었고 김 장관은 발표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김 장관의 평소 소신을 잘 알고 있던 과기처 직원들은 한동안 정부 산업 관련조직이나 업무가 대폭 축소되거나 체신부에 이관된다는 설에시달렸습니다. 김 장관의 소신과 관련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안과 관련해서만큼은 일정 부분에 대해 체신부 쪽을 밀어준다는 것이 과기처의 공식입장이었던 거죠.』
한편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관련부처나 업계의 입장은 이 안을 민정당의 국회상정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85년 10월 7일 민정당 공청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언론에 지상중계되거나 요약된 기사들의 재구성을 통해 공청회에 참석했던 각 패널들의 입장을 옮겨보자.
『경제정책이 정부에서 민간 주도로 옮겨가는 이 때에 특정 산업을 정부가 나서 육성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조항들이 미국의 통상법 301조에 적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L 국장)
『정보사회란 모든 사회가 다 같이 흘러가야 되는 것인데 어느 한 부처가 모든 것을 주도해서는 안된다. 부처마다 기능별로 맡아야 할 역할이 따로 있다고 본다. 첨단기술 개발까지를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이 규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기처 기술정책실 C 실장)
『제도나 법규가 부처마다 서로 상치되는 것이 많아 사업자들이 큰 불편을 겪어왔다. 전산망사업에서 부처이기주의 때문에 표준이나 호환성같은 분야에 혼선이 초래된다면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실이겠는가.』 (체신부 통신정책국 Y 국장)
『관련 육성법이 없어 정보산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법 제정에 신경쓰기 이전에 기존의 법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시급한 것은 누가 주도하든가 정부와 민간기업간의 역할분담과 질서체계가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소프트웨어연구조합 P 이사장)
아무튼 85년 가을 국회에서는 과학기술혁신 기본법과 공업발전법만 통과됐다.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은 이듬해 5월에서야 제정됐다. 체신부와 민정당의 의지 그대로였다. 이 법의 시행은 특히 체신부에 엄청난 지위격상을 의미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과정이 곧 이 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체신부 차관으로 전산망 보급확장법 입안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은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된 직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됐으므로 이제 하나의 줄거리가 잡힌 셈입니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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