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은 한글날. 세종대왕이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우리 고유의 글 한글을 창제했지만 컴퓨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부터 가장 많은 논란거리를 바로 이 한글이 제공하고 있다.
올해는 한글에 대한 국제규격이 제정되고 남, 북한간의 관련분야 통일안이 속속 발표되는 등 한글 정보화의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한글 정보화」는 한글을 컴퓨터에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문제와 이를 이용한 SW시장의 방향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한글의 컴퓨터 표준은 이 땅에 PC가 상륙한 이후 가장 빈도가 잦은 시비거리였다. 국내적으로는 완성형과 조합형 논란, 남북한간에는 「통일 규격」, 국제적으로는 유니코드의 수용여부가 언제나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지난 8월 14일 중국 연변에서 열린 「제3회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 학술대회」에서 채택된 「남북 컴퓨터 자판 통일 권고안」을 놓고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세종대왕이 다시 살아 왔다하더라도 「눈살을 찌푸릴」 한글 코드 논쟁은정부가 국제 표준규격인 유니코드에 의거한 KS규격을 제정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논쟁의 핵심은 「컴퓨터 사용 편리성에 한글을 맞출 것이냐」 아니면 「한글의 우수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컴퓨터 사용 환경을 뒷받침하느냐」이다. 각각의 논거는 완성형과 조합형.
지난 87년 정부가 한글 2천3백50자만을 표현하는 완성형을 국가 표준으로 제정한 이후 조합형주의자들의 거듭된 주장에 따라 92년에 조합형을 병행 표준화할 때까지 정책의 혼선에 따른 피해는 관련 업계뿐 아니라 사용자들에게까지 미쳤다.
절충안으로 국내에서는 사용자들에 의한 자연스런 산업 표준 정착이 기대됐지만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세계 컴퓨터업계의 거대기업이 중심이 된 유니코드가 등장,이번엔 국제 표준규격내에 한글을 얼마만큼 포함시킬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 올랐다.
유니코드는 16비트를 기본으로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단일 코드체계화하자는 것. 여기에는 모두 6만5천5백36자의 셀이 있고 이것을 다시 각국간에 나누어 가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각국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셀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했고 특히 중국과 일본등은 한글이 셀을 많이 가져 갈 수록 자신들의 한자 영역이 줄어들어 반대가 심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국제 표준 6만5천5백36자의 셀중에서 한글은 불과 2천3백50자만을 확보했다. 그러나 업계와 학계 정부가 발벗고 나서 결국 1만1천1백72자의 코드를 얻어 냈다. 이것은 한글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글자를 수용하고 고어까지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완성조합형 논쟁을 일단락 지을 수 있고 컴퓨터 분야에서 처음으로 국익을 관철시킨 예로 평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는 한글 코드의 국제 및 국내 표준이 결정돼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지만 얼마전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여준 「윈도 95 파동」처럼 아직 갈 길은 멀다. 한글의 컴퓨터화가 궁극적으로는 운용체계(OS)와 연계할 수 밖에 없고 그 주도권은 미국, 정확히 마이크로소프트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또 통일 시대에 대비한 남북한간의 한글 통일안 역시 난제로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 조차 2벌식과 3벌식 자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 통일 자판의 실현은 아직 멀기만 하다.
여기에 부팅, 도스, 인스톨, 클릭등 명령어를 비롯한 모든 용어가 영어로 돼 있어 초보자들의 컴퓨터 공포증을 더욱 확대 재생산시키고 있는 현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영어 명령어에 더욱 익숙해 있고 그것이 마치 컴퓨터 사용 숙련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인식되고 있는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과 함께 한글 용어의 통일이 시급한 과제다. 일부 단체나 문체부등이 나서 각종 용어의 한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아직 호응도는 낮다. 글과 말은 그 나라의 문화다. 현재 세종대왕 덕을 가장 많이 보는 업계는 한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업체들이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예외지역으로 평가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한글과 컴퓨터, 삼성전자 등 강력한 로컬업체들이 버티고 있어 소프트웨어협회 조사로는 점유율이 20%에도 훨씬 못미친다.
이 때문에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사장은 「한국의 빌 게이츠」라는 별칭까지 얻었고 그 회사는 91년 10억원의 매출에서 출발, 올해는 2백50억원의 외형으로 성장한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불법 복제율이 50%가 넘는 현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팽창이다.
업계에서는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유일하게 국내 시장을 지키고 있는 워드 프로세서의 경우 국내업체들이 한국적 상황, 예컨데 도표처리등 작지만 민감한 수용자의 요구를 정확하게 수용하고 있어 앞으로도 이같은 시장 판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간 축적된 노하우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최근 붐이 일고 있는 인터넷 한글 처리 시장의 다양한 제품 개발도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80년대말까지 한글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가장 부끄러워 했던 것은 글꼴(폰트)이었다. 서체 디자인 전문가도 별로 없을 뿐더러 국산이라 해봐야 조잡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글꼴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으로 조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과 전자출판 시장의 급팽창으로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래아 한글만해도 30여가지가 넘는 다양한 글꼴을 제공하고 있고 훈민정음 역시 비슷한 정도의 글꼴을 지원한다.
휴먼컴퓨터 서울시스템등은 일본이나 중국에 글꼴을 수출하는 단계에 있고 태시스템 신명시스템즈등 서체 전문회사들이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을 정도가 됐다. 올해에는 글꼴 시장만 2백50억원을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업계는 한글 정보화가 지난 10여년간의 골치거리였던 표준화가 일단락되고 통일 시대를 대비한 남북한 학자들의 정보 교류가 본격화됨에 따라 더욱 진일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워드크로세서나 글꼴, 용어 순화등에 정열을 바치는 사람들이 컴퓨터 업계에서는 최고 수준의 젊은 인재들이라는 점에서 세종대왕도 「미소 지을 것」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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