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29);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과기처와 상공부의 정보산업 주도권 쟁탈전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던 70년대말까지도 체신부는 정부 정책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않다. 체신 업무나 전화고지서 업무 전산화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을 잇따라 진행시켜 나가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처내 고유업무일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이런 움직임은 훗날 체신부가 국가기간전산망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는 준비 작업,즉 정중동이었음을 알수 있다.

체신부의 정중동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81년 10월 전기통신조직부문을 한국전기통신공사(KTA,현 한국통신)라는 법인체로 공사화 시키면서부터이다. 체신부는 KTA의 출범을 70년대 초반부터 계획해오던 터였다. 이런 KTA를 통해 정보산업 정책의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 체신부의 기본 구상이었다.

과기처가 과학기술 개발과 보급의 측면에서, 상공부가 컴퓨터의 국산화 측면에서 각각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하고 있었다면 체신부는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을 접목하는 또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정책의 최일선에 나설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KTA를 출범시킨 직후 체신부는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을 접목시키는 시도로서 81년을 전후하여 잇따라 몇가지 중대한 사건(?)들을 터트리는데 한국데이타통신(데이콤의 전신)의 출범, 서울지역 114번호 안내시스템의 개통,전자식공중전화기의 개발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82년 3월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은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 5천대보급계획>,상공부의 <전자계산기 산업육성을 위한 전문업체선정 요강>등에 이어튀어 나온,거의 홈런성에 가까운 체신부의 역작이었다. 체신부는 KTA와 민간 합작기업인 한국데이타통신을 통해 정보산업 육성 정책의 전면에 나설수있믐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었다.

114번호안내시스템의 개통이나 전자식 공중전화기의 개발은 체신부의 잠재력을 일반인에게 그대로 드러내 준 화제거리였다.지금 같아서는 아무런 뉴스거리가 못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이 얘기가 언론마다 대서 특필됨으로써체신부의 위상을 한껏 높여줬던 것이다.

이전까지 114 안내는 교환양들이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뒤져가며 가입자의요구에 응답해야 했는데 이 시스템이 개통되면서 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114 전화안내시스템의 개통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전화보급이급팽창할 것임을 예고해줬고 그것은 컴퓨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준 최조의 쾌거였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전자식 공중전화기의 개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 공중전화기(지금은 사라진 주황색 다이얼식 전화기)는 기구부품을 사용하던 것이어서 주화(동전)를 판별력이나 시외전화 기능 등 신뢰성과 확장성에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화기 내에 「유-컴퓨터(U-Computer)」라는 초소형 마이크로컴퓨터를 채택하고 전자회로를 내장함으로써 신뢰성이 확장성 문제를 극복해 낸 것이다. 출범 과정이나 개발 비화를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82년 3월10일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설립 작업은 이미81년 8월부터 체신부의 내부 프로젝트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81년 8월 체신부는 정부와 업계인사를 주축으로 <국내 정보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정보유통(정보통신)의 대량화 및 고속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담기구 설립 위원회>라는 긴 명칭의 별동조직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위원장)에 오명 차관을 내정했다. 오명 차관은 통신정책국장 이해욱 등을 축으로한 설립 작업 전담반을 이끌고 이듬해 1월 27일 발기인대회에 이어 3월10일 창립총회까지 한국데이타통신 출범의 산파역을 맡게 된다.

창립총회에서는 큐닉스 대표이사 이용태가 초대사장으로 선임됐고 정부·기업·언론 관계자 등 지도급인사가 망라된 12명의 비상근 임원과 감사가 임명됐다. 주요인사를 보면 이해욱·정문화(총무처 행정관리국장)·신만교(과기처 정보계획국장)·최순달(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김성진(연합통신사장)·강진구(한국전자통신사장)등이었다.

주식회사로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성격은 25개 출자사의 기업적 성격이나 지분 비율을 들여다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출범 자본금 59억8천만원 가운데 최대주주인 KTA는 20억원(33.45%),한국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의 전신)·동양정밀·국제상사 등은 각각 5억원씩(8.36%)을 출자했다. 또 KBS·금성반도체·대영전자·대한전선(대우통신 전신)·연합통신 등이 각각 3억5천~2억원 씩을,삼성전자·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이 각각 1억원씩을 출자했다.

이밖에 금성사·동양나이론·제일정밀 등 12개사가 5천만원 씩을 출자,0.83%씩의 지분률을 확보했다.

지분률 배분 문제는 90년대 초반 개국한 서울방송이나 최근의 PCS사업자 선정등 사례에 비견될 만큼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큰 화제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부분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들이었던 이들은 컴퓨터 국산화 분야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던 기업들이었던 데다 체신부의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의 접목 정책에 적극 동조하는 세력들이기도 했다. 따라서체신부는 한국데이터통신의 출범을 계기로 확실한 민간 후원 기반을 마련해놓은 셈이었다.

이처럼 체신부와 출자사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사업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골자였다.

1.데이터통신망의 구성과 운용 2.데이터통신 회선·부가장치·단말기의 대여 3.컴퓨터에 의한 정보처리·정보 수집가공 및 판매 4.소프트웨어 개발 및판매 5.국내외 데이터뱅크와의 연결운용 6.데이터통신기술의 연구개발과 실용화 7.데이터통신에 관한 표준화연구·교육훈련·홍보

<114전화안내시스템>

77년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에서 개발이 시작됐다가 KTRI의 후신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에 의해 완성된 114번호안애시스템은 81년12월 서울을지전화국에서 전면 개통된 국내 최초의 자동전화번호안내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전화번호안내는 57년 7월 서울 중앙전화국 교환과 안내계로 발족,서울지역 가입자 번호를 안내해오다 70년 8월 을지 전화국으로 시설과 업무가 이전됐다. 그러니까 114 번호안내시스템은 그동안 을지전화국 안내양이일일히 전화번호부를 뒤져 수동으로 처리하던 안내업무를 전산화한 것이었다. 당시 을지전화국 안내과장 J씨의 시스템도입 배경에 대한 회고.

『전화가입자 수가 1백만명 정도면 수작업이나 전산시스템에 의한 작업이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3백만명이 넘으면 문제는 달라지죠. 컴퓨터가 작업하는 시간은 1백만명 일때나 3백만명 일때나 큰 차이가 없는데 안내양의 수작업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당시 서울시 가입자수는 연평균35만명씩 증가하고 있었는데 그 추세대로라면 86년에는 3백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3백50여명이나 되던 안내양을 무작정 늘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던 거죠』

114번호안내시스템 프로젝트는 휴렛팩커드(HP)의 「HP 1000」(미니급) 2대를 비롯, 한글단말기(CRT터미널) 2백60여대가 투입된 대규모 사업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KTA(물론 그 주체는 체신부였겠지만) 측은 개발완료시점에서 114번호안내시스템 프로젝트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시스템 개발책임자였던 KETRI 소프트웨어실장 C씨의 회고.

『시스템 개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KTA는 단말기 접속수를 늘리기 위해「HP 1000」의 고유한 운용체제 대신 새로운 운용체제 개발을 요구하는 등설계변경을 요구해왔습니다. 또 114안내 뿐아니라 나중에 전화요금 고지서와고객청약 데이터 등을 동반 처리할 수 있도록 확장성을 염두에 둔 설계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이시스템을 표준화해서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에 추가 공급하기 위해서였죠』

KTA가 뒤늦게 114번호안내시스템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것은 간단했다. 폭주하는 가입자 안내전화에 대응 기능외에 잘만 활용하면 반대로 전화가입자의 폭주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114번호안내시스템 때문만은아니겠지만 아뭏튼 국내 전화가입자는 KTA의 소망대로 87년 1천만대를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전자식 공중전화기>

체신부는 81년초반 만해도 주화 판별 기능,장거리자동전화(DDD)기능,112.119등 긴급통화 및 다양한 무료서비스 기능, 전력소모가 적고 크기 작으며 가격이 저렴한 특징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만한 공중전화기의 개발이 국내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당시 정부 측에 신형 전자식 공중전화기 개발을 밀어부쳤던 체신부 국장 P씨의 회고.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하면서 정부는 외국기기의 대량 도입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죠. 그때 비공식적으로 알아본 일본산 공중전화기 1대 값이 무려2백만원정도 였습니다. 상부에서 난색을 표명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청와대 쪽에서 어떻게든 국산을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결국 KETRI가 그일을 맡았는데 KETRI는 1년여 만에 일본산 전화기 5백대 값인 1억원의 연구비만을 투입,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전화기를 개발해낸 것이죠』

이렇게 개발된 전화기는 곧 금성통신과 동양정밀에 설계기술이 전수돼 82년 7월부터 양산에 나서게 된다. 나중에는 수요가 폭발하면서 10여개의 기업이 추가 생산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전자식 공중전화기는 특히 주화판별 기능이 뛰어나 컴퓨터의 위력이 실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화기는 통화 도중 동전이 부족할 때는 사전에 경보음을 울려주면서도 통화가 끝났을 때 남은 거스름돈(낙전)은 그대로 삼키고 마는 얌체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낙전 뮨제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여 KTA를 공궁에 몰아 넣기도 했다. 공중전화의 낙전 수입 처리 문제는 그러나 87년 체신부의 공식 발표 한마디로 해소되고 만다. 그발표내용이 무엇이었을까.낙전수입으로 교육용컴퓨터를 구입,전국의 초등학교에보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는 이미 체신부가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에깊숙하게 관여하던 시기였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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