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산업을 가장 밑에서 받치고 있는 분야가 유통이다. 산업으로서소프트웨어 유통은 개발자와 최종 사용자(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유통 분야가 확고한 기반을 갖추고 있어야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이 이루어질수 있음은 물론이다. 유통회사의 역할이 상품을 창조하는 개발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유통 분야는 한마디로 유통사는 존재하되유통 그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가설이 통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통신 산업 전체가 날로 확대되고 근대화되고 있는 반면 소프트웨어 유통은오히려 전근대화를 치닫고 있다는 얘기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패키지를 포함한 전체 컴퓨터 유통 분야에서 재판점(Reseller)을 제외하고 자본금 3억원 이상인 디스트리뷰터 및 총판급 유통사는 전국적으로 2백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가운데 소프트웨어의 공급을 하드웨어에 대한 구색 맞추기 차원을 넘어본격적인 사업 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곳은 약 25%대인 50여 개사에 이른다. 그러나 자본금 3억원 이상인 유통사 가운데 순수하게 소프트웨어만 공급하는회사는 단한 곳도 없다. 그나마 소프트웨어에 대한 매출이 하드웨어 부문을능가하거나 비슷한 곳은 10여 개사 정도이다.
95년도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유통부문 시장규모는 비지니스분야,교육용 및말티미디어 컨텐츠 분야,취미오락분야,CAD·CAM분야를 비롯 OEM을 제외한 소매용 운용체제(OS)를 포함해서 모두 3천5백억원 정도가 형성됐던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96년도에는 공급 제품 수는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제품 단가의 전반적인 하락세가 지속돼 외형 매출 규모는 제자리걸음할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유통은 80년대말 정부의 유통시장 개방과 함께 그 대응책의 하나로 본격적인 산업의 기초가 마련됐다. 정확하게는 89년 삼성물산·선경·럭키금성상사등 수출입에 주력하던 종합상사들이 소프트웨어 유통업에 진출하면서부터 국내에 소프트웨어 유통이란 말이 통용되시 시작한 것이다. 이들 3사는 유통시장 개방에 대비하고 관련산업의 안정적 기반 구축을도모한다는 2가지 목표아래 각각 삼테크·선경유통·마니유통 이라는 소프트웨어 유통전문 자회사를 출범시켰다. 3사는 처음부터 소프트웨어 유통전문업을 표방하면서 종합상사 계열사 답게 1백평∼2백평 규모의 대형 양판점을 서너 곳씩 여는등 상당한 투자의욕을 보였다.
이로부터 7년여가 지난 96년 현재 이들 3사의 자회사 가운데 소프트웨어유통업을 표방하고 있는 회사는 하나도 없다. 삼테크와 선경유통의 경우 주력분야를 시스템 부가가치판매(VAR)등 시스템통합(SI)사업과 하드웨어공급 사업으로 전환했고 마니유통은 출범 2년도 못돼 非 정보산업 분야로 전업하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종합상사 3사 계열사들의 현재 위치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유통산업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는 얘기다. 즉 독자적인 영역을 가져할 소프트웨어 유통산업이 확실한 입지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유통산업은 90년을 전후해서 왕성한 의욕을 갖고 출발했지만 94년 이후 「프라이스 클럽」과 같은 유형의 이른바 가격 파괴 바람속에 그나마 마련됐던 기반 마저 무너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사실 이때 불어 닥친 가격파괴 바람이 모든 소프트웨어 제품들에 영향을 준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공급하는 「엑셀」이나 「한글오피스」와 같은 유명 외국산 제품들은 그 바람을 피해 제값을 받을 수 있었고 일반 매장에 출하되기 까지의 유통구조도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
「엑셀」 등이 정상적인 유통구조를 거치면서 제값을 받을수 있었던 가장큰 이유는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제품들은 이를테면 항상 수요자가 넘쳐 언제든지 현금화 할수 있는 『보증수표』라는 얘기다. 유통업계에서는 지금도 시장에 출하되는 패키지 가운데 『현금으로 보이는(?) 것은 MS제품과 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 뿐이다』라는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가격파괴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제대로 개발된 제품이나 사용자들로 부터 지명도가 높은 제품은 피해갈 수 있었다는 반증이다.
일반적으로 가격파괴 때문에 소프트웨어 유통산업이 무너졌다면 그 주범으로는 당사자들인 유통사·소프트웨어 개발사·사용자등 3자가 꼽수 밖에 없다. 이를테면 유통사는 유통단계에서 가격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고 개발사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지 못했으며 끊임없는 수요를 창출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용자들은 불법복제나 비정상적 유통구조로 획득되는 회색 상품에만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3자 책임론은 소프트웨어가 전 산업을 통털어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미국에서나 적용되는 논리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유통분야와 개발분야가 자생력을 바탕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기업 층도 두터워서 서로를 견제할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통사입장에서는 개발사로부터 시장 가치가 있는 제품만 구매해주며 개발사들은처음부터 유통사가 구매해주지 않을 어설픈 제품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자들은 유통사와 개발사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력에 의해 브랜드의 선택이나 구입에 크게 고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황은 미국과 크게 다르다. 극히 소수의 업체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은 자금회전이 빠른 유통사나 덩지가 큰PC 공급자에 절대적으로 예속돼 있는 상황이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개발사들이 자금회전에 민감하지 못한데다 기업적으로 영세하다는 점을 들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통사들은 자금을 무기로 개발사들의 제품을 입도선매하는것이 다반사이며 소비자가격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흔히 개발원과 판매원이 따로 구분돼 있는 제품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쯤되면 소프트웨어 개발은 개발사가 기획해서 주도하는 것이 아닌,유통사에의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유통사들이 제품의 안정성이나 컴퓨터 사용자들의요구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으며 개발사는 수주개발 프로젝트 처럼 일정한금액을 받고 필요한 제품을 개발해주면 그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사실 사용자들 입장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더욱이 사용자들이 이런 제품을 돈을 주고 구입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유통사 매출이 줄지 않는 것은 유통사 끼리 거래를 통해 2중·3중의 유통구조를 만들어 냄으로써 차익을 챙기기 때문이다.이런 소프트웨어들은 유통사들을 통해 전국을 몇바뀌 순회한 다음 자연 폐기되거나 PC회사들의 번들용 제품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결국 이같은 전근적 유통구조속에서 소프트웨어 유통사는 존재하되 소프트웨어 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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