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WE와 GTE, 서독의 지멘스, 일본의 후지쯔와 NEC를 대상으로 실시된전자교환기 제2기종을 선정하는 국제입찰은 79년 6월 20일에 마감되었는데, 이는 내자와 외자를 합쳐 1백억달러에 이르는 우리나라 국제입찰사상 최대규모였다. 이 국제입찰에는 GTE가 삼성 GTE통신과, 지멘스가 금성통신과, 후 지쯔가 대한통신과 공동으로 응찰했고, WE는 국내 파트너가 없이 단독으로 응찰했으며, NEC는 응찰제안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한편 스트로저 교환기를 생산하고 있던 동양정밀은 예전의 파트너였던 ITT가 KTC와 합작관계에 있기때문에 입찰에 불참했다.
기종 선정작업은 통신기술연구소(KTRI)가 주관했는데, 이와는 별도로 전자공 업진흥회장 김완희가 전자공업 발전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검토했다. 선정 기준으로는 교환기의 성능과 신뢰도, 경제성 등을 첫째 항목으로 내세웠고, 조기 국산화를 통한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에의 기여도를 둘째 항목으로 내세 웠다. 이어서 대외교역 및 외교관계 발전에의 기여도를 또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는 1백억달러에 달하는 사상 최대의 국제입찰을 통하여 단순히 전화 문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전자산업 발전과 무역수지 개선도 감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입찰제안서를 검토한 결과 WE의 No. 1A기종이 종합적으로 볼 때 우수하고 유리한 제품이며, 나머지 3개 회사의 기종은 큰 차이가 없어 차선책으로 어느 기종을 채택해도 무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입가격은 1만회선을 기준으로 할 때 후지쯔가 2백13달러, GTE가 2백86달 러, 지멘스가 2백46달러, WE가 2백93달러였다. 그중 후지쯔의 FETEX 100L 기종은 성능이 우수하고 수입가가 가장 낮으나, 안정된 기술이 아니고 기술 제공이나 수출에 제한조건이 붙어 있어 전자공업 발전에의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비해 WE의 No. 1A는 계열회사인 벨연구 소에서 개발한 원천기술로서 성능이 우수하고 안정된 기술이며 기술 제공 조건도 유리했다. 다만 수입가가 제일 높은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는데, 그것도3만회선의 대용량국에 설치할 경우 경제성이 있어 회선당 2백달러 정도까지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정부는 당초 7월말까지 기종 선정을 끝낼 계획이었으나, 사업 규모가 워낙크고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데다 정부 관련 부처간에도 견해가 엇갈려 작업이 거듭 지연되었다. 주무부처인 체신부는 교환기의 성능과 국산 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상공부는 한미간의 무역 현안인 석유 공급 및 컬러TV 등에 대한 미국의 수입규제조치와 연계해 협상하려고 했다. 그때정부는 컬러 TV의 대미 수출의 길을 트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관련된 정부의 관심도 비상했다. 그 무렵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양국의 경제장관회담에서 미 재무부장관을 통해 미국 회사의 교환 기를 채택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독의 슈미트 수상은 서독 회사 교환기의 채택을 위한 박대통령의 배려를 요청한다는 전문을 보내 오기도 했다. 또한 관련국의 대사들은 체신부장관을 방문하여 자국 회사의 교환기를 채택해 달라고 로비를 했다.
이처럼 정부 부처간이나 관련국과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가운데 기종선정작업이 미뤄지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10.26사태가 발생하여 정치.사회 정세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자 제2기종의 선정 문제는 한때 뒷전으로 밀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재설 체신부장관은 어려운 주변정세를 무릅쓰고 그해 10월에 작성한 "전자교환 제2기종 선정 검토결과"라는 이름의 정책안에 대해 11월 10일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제2기종으로 미국 AT&T그룹 의 한 회사인 WE의 No.1A가 선정되었다.
체신부는 WE의 No.1A를 선택하면서 10개항에 이르는 이유를 들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설계면에서 후지쯔의 교환기가 좀더 현대적이나 교환기의 성능, 사용경력 생산기술, 통신망의 운용관리기술 등 종합적인 기술면에서 그 우수성 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둘째, 수입 교환기의 가격면에서 후지쯔.지멘스에 비해 고가이나 대용량국으 로 활용시의 단가 하락 및 통신망 구성의 경제성, 환위험부담 측면, 사용경 력 및 안정된 기술에서 오는 운용.보수의 용이성 등 종합적인 교환시설의 경 제성면에서 가장 유리하다.
셋째, WE와 계열인 벨연구소는 대부분의 통신 관련기술과 많은 전자기술의 원천으로 세계제일의 기술개발 실적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신기술의제공 기술개발에의 참여협력의 기회를 제안하고 있다.
넷째, AT&T의 위치와 영향력으로 보아 수출증대 및 경제.외교관계의 개선 등 경제전반의 실리면에서도 가장 유리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이유로 제2기종으로 WE의 No.1A전자교환기가 쉽사리 결정되었다.
"No.1A를 채택할 때는 수의계약을 하다시피 했어요. WE가 응찰한다니까 전세 계에서 따라갈 회사가 없었어요." 기종 선정의 실무책임자였던 기술정책관 정도길의 주장이었다.
"No.1A기종이라면 기술적인 측면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가격 이 높다는 게 흠이었죠. 또 생산측면에서 과연 그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를 국산화해서 소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있었지만, 사용자 입장 에서 본다면 가장 바람직한 교환기였죠." 당시의 체신부 계획4과장 유택로가 덧붙였다.
이와 같은 발표와 증언을 통해 볼 때 No.1A의 채택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제2기종의 선정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배경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주무부처인 체신부에서도 이재설 장관을 제외하고는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2기종의 선정이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어 발표된 것은 한달 후인 12월 14 일이었다. 이 날 체신부는 "전자교환 제2기종 선정 및 통신산업체계 정비"라 는 이름의 발표문을 통해 미국의 WEI(Western Electric International)사가 제안한 No. 1A ESS를 제2기종으로 선택했다고 공표한 다음, 국내의 통신기기 생산체계를 민간주도의 자율경쟁체제로 발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다.
첫째, 전자교환기를 위시한 주요 통신기기 생산을 4원화하여 4개의 생산단위 를 갖도록 한다.
둘째, 기존 산업은행 출자기업인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를 민영화한다.
셋째, 전자통신산업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술 역량의 축적과 주요 시설에 의 투자 등 준비와 요건을 갖춘 유수 관련 기업들로 하여금 전자교환기 및주요 통신기기 생산에 참여하도록 한다.
발표일인 12월 14일은 정부의 개각이 있던 날로 체신부장관 이재설은 농수산 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체신부에서 이임식을 마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WE는 단독 응찰을 했기 때문에 국내 파트너는 4개의 민간업체, 즉 금성통신.동양정밀.대한통신.삼성GTE순으로 업체끼리 쌍무협상을 통해 기술제휴 또는 합작투자를 유도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장관이 열거한 네 회사의 순위는 우리나라 통신산업 발전에 기여한 실적에 따라 매긴 것이었다.
한편 정부는 기술력의 축적과 주요 시설에의 투자 등의 요건을 갖춘 4대 기업 중 우선순위 1위인 금성통신에 선택권을 부여한 결과 금성통신이 제2기종 을 선택했다. 이를 토대로 체신부는 KTC를 인수할 삼성GTE통신을 ITT의 제1 공장, 동양정밀을 ITT의 제2공장으로, 그리고 금성통신을 WE의 제1공장, 대한통신을 WE의 제2공장으로 지정함으로써 전자교환기 생산단위의 4원화가 이루어졌다. 각 회사의 초기 생산 규모는 금성통신이 30만회선, 나머지 3개 회사가 20만회선이었다.
이에 앞서 이재설 장관은 4개 회사 대표를 불러 KTC의 인수의사를 타진했다.
제2기종을선택한 금성통신은 인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동양정밀과 대한통신은 기존의 교환기 생산시설을 갖고 있는데 KTC를 인수하는 것은 부담이클 뿐만 아니라 제2기종의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 보다 채산성이 있을 것으로판단 인수를 사양했다. 그러자 삼성GTE통신 강진구 사장이 KTC를 인수하겠다 고 나섰다.
당시의 KTC는 자본금이 1백14억원, 부채가 3백억원이었는데 산업은행이 재평가를 한 자산 총액은 1백40억원이어서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쉽사리 인수 하기는 어려웠다. 또 KTC는 연간 66만회선의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으로서 전자교환기의 생산 단위를 4원화할 때 과잉시설이라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따라서 KTC를 인수하는 회사는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 이공공연히 거론되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전화교환기 생산에의 참여를 갈망했던 삼성은 더없이 좋은 기회라 판단해서 인수를 결정했던 것이다.
한편 전자교환기 생산의 4원화는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79년 12월에 단행된 2기종 4원화의 원칙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2개의 전자교환기 기종을4 개 회사가 생산.공급함으로써 모든 말썽이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국 내 업계의 이해관계 때문에 예기치 않은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M10CN의 경우 50%의 생산권을 부여받은 동양정밀이 생산기술을 도입해야 하는데, 기술 공급원인 ITT측에서는 "이미 KTC와 기술제휴계약을 맺고 있어 국제 관례 상 KTC 이외에는 기술제공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No.1A의 경우도 금성통신과 대한통신이 같은 기술공급원인 WE를 상대로 기술제휴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3자협상에 따른 문제점이 복잡미묘하여 계약 이 계속 지연되었다.
또한 전자교환기의 생산을 4원화할 경우 규모의 경제를 기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실제로 4원화가 이뤄질 경우 회선당 단가가 13% 이상 올라갈수 있다는 수치마저 제시되었다. 전자교환기 생산설비의 적정단위는 최소 연간 50만~60만 회선인데, 4원화가 될 경우 업체당 20만~30만회선으로 줄어들어 경제성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외국의 1개 업체와 연결되어 있는 국내의 2개 업체끼리 심하게 다투는 바람에 외국업체와의 협상 이 매우 불리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복투자를 피하여 2원화의 생산체제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5.17후 신군부의 집권에 의해 탄생한 새 정부는 국보위의 주도하에 중화학공업의 투자 조정"을 단행했다. 그 내용인즉, 불필요하게 중복투자를 하고 있는 발전설비.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의 투자조정을 관련업체간에 자율적으로 하라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정부에서 조정해 주는 강압적인 조치 였다. 정부는 80년 8월에 1차로 발전설비 및 자동차공업 분야의 투자조정을 단행한 데 이어, 그해 9월에는 2차 투자조정 대상으로 전자교환기 및 중전 기.건설중장비.석유화학 부문을 지정하고 자율조정을 통한 해결을 촉구했다.
그러나 업체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자율조정이 쉽게 이뤄지지 않자 그해 10월 에 정부의 직권조정이 단행되었다. 국보위상공분과 위원회와 상공부가 주축 이 되어 단행된 최종 조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자교환방식에 의한 국설교환기 생산업체는 제1기종에 한국전자통신, 제2기종에 금성반도체로 한다.
둘째, 농어촌 전자교환기 생산업체는 동양정밀로 전문화한다.
셋째, 대한통신에 출자한 대우실업의 주식 지분은 회수시켜 한국중공업의 발전설비에 투자토록 한다.
넷째, 금성통신 및 동양정밀에서 생산하는 기계식 사설 구내교환기의 생산은 중단한다. 이렇게 해서 KTC를 인수한 삼성그룹이 제1기종인 M10CN의, 금성반도체가 제2 기종인 No.1A의 단독 생산업체가 되었으며, 동양정밀은 앞으로 공급될 농어 촌용 전자교환기를 생산하도록 조정했다.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동안 중단되었던 금성반도체와 WE 사이의 협상 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80년 11월에 양사간에 합작투자 및 기술제휴계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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