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10)

프로젝트 책임자인 경상현과 안병성 유성재 박사를 주축으로 하여 구성된 태 스크포스가 맡은 일은 시분할 전자통신망기기의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개 발품이 적용될 때까지 사용할 교환방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EPB 프로젝트 "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3월 1일부터 6월말까지의 4개월 동안에 완료하도록 계획돼 있었기 때문에 깊이있는 검토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실제 작업은 전자교환기 개발계획보다는 잠정적으로 사용할 교환방식의 선정에 치중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작업은 기존의 기계식교환기와 전자교환기와의 경제 성을 비교하여 전자교환기 채택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그것이 채택될 경우 어느 나라의 어떤 기종을 어떤 조건으로 들여와야 한다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구체적인 협의도 없이 교환기 가격이 나 기술 전수조건 등을 구체화 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그들은 "타당성 검토 라는 전제를 붙여 국제입찰을 실시했다.

"전자교환기가 경제성이 있으려면 회선당 단가가 얼마 이내여야 한다는 게나와야 경제성 비교가 될 텐데, 미국에서는 현재 얼마에 거래되고 있고 대만에서 계약한 단가는 얼마라는 수치 정도 가지고는 안되겠더라구요. 우리가 살 경우 얼마라는 수치가 정확히 나와야 하는데,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외국 사람한테 물어보면 책임없는 얘기만 할 거고, 누가 편지에다 얼마라고 적어준다고 해서 믿을 수도 없었죠."더군다나 그 당시국내 기존업체들이 상당히 반발했어요.

통신산업이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일어서 보려고 하는데, 전자교환기를 들여온다 해서 흩뜨려 놓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거였죠. 그래서 반대하고 반발하고 있는데, 어느 나라에서는 전자교환기를 얼마에 샀다더라 하는 말 정도로는 안되겠으니 자신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생 각다 못해 정부 허가를 받아 국제입찰을 실시했던 겁니다. 이것은 타당성 검토를 하기 위한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만약에 타당성 검토가 긍정적으로 끝나서 전자교환기를 채택하게 되면 국제입찰에서 선정되는 업체가 납품을 하게 된다고 했죠.

프로젝트 책임자인 경상현의 이야기였다.

입찰규격서(RFP)를 만드는 데는 홍콩에 소재한 영국계 통신회사인 C&WS(Cabl e & Wireless Sys-tems)의 도움을 받았다.

"입찰규격서를 만든다 해서 우리끼리 작업을 해봤어요. 그런데 교환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까 작업이 잘 안돼 홍콩에 있는 C&W회사와 용역계약을 맺었어요. 거기서 기술자 몇명을 KIST에 불러다 초안을 만들게 해서 우리가 만든 초안과 합쳐서 종합적인 입찰규격서를 만들었던 거죠."안병성 실장의 이야기였다. 전자교환기 도입을 위한 국제입찰은 76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프로젝트 전담반은 KIST소장 명의로 미국의 WEI와 ITT, GTE, 일본의 NEC와 후지쯔(부사통신), 서독의 지멘스 등 6개 통신산업체에 입찰안내서를 보냈고 이어서 1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각종 조건을 제시했다. 그 주요 내용은앞으로 5년간 각각 50만, 1백만, 1백50만 회선을 생산할 경우 시설투자비를 포함한 회선당 단가, 연도별 국산화 계획, 합작과 기술이양 조건 등을 명기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해 6월 14일 입찰을 마감한 결과 WEI를 제외한 5개 회사가 응찰했는데, 가격은 NEC가 회선당 1백70달러, 후지쯔가 1백90달러, 지멘스가 4백40달러, ITT가 4백50달러, GTE가 5백50달러로 일본 업체가 가장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가격과 기술도입 조건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논란이 거듭되었다.

전담반은 2주일 동안 입찰서류를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은 짤막한 결론을 담아 경제기획원과 체신부에 보고했다.

첫째, 현시점에서 공간분할 전자교환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전자교환방식 채택을 원칙적인 정책 방향으로 결정할 것을 건의한다.

셋째, 전자교환방식의 효과적인 도입, 생산 및 운용을 추진하기 위한 자율성 있는 기구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6월말로 못박힌 기한에 쫓기다 보니 그들 자신들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막연하나마 전자교환기를 도입하는 것이 충분히 타당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하는 정도의 보고를 했죠. 그런데 정말 자신이 없는 것은 "입찰한 서류만 봐서는 가격이나 기술을 주겠다는 조건 등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은 응찰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하나하나 따져보고, 그것에 대한 해명 을 서면으로 받아 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불확실한 게 너무많습니다 하는 정도로 보고를 마쳤죠." 프로젝트 책임자 경상현의 이야기였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전담반은 해체되었다. 경상현도 소속 직장인 원자력 연구소로 복귀했다. 그런데 며칠후 이경식 체신부차관이 그를 불렀다.

"이렇게 충분히 타당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는 정도 가지고서야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하겠습니까. 연말까지 시간을 더 드릴 테니까 입찰에 참여한 회사 대표들을 불러 교환기 가격은 물론, 특히 기술이양조건 등을 하나하나 따져서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게 해주세요." 체신부의 이러한 요청에 따라 경상현은 그해 연말까지를 기한으로 해서 7월 초에 팀을 재구성했다. 그 팀에서 하는 일은 응찰한 외국생산업체로부터 추가자료를 접수하여 1차 검토시의 의문점을 해결하는 한편 그들과의 협상을 통해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회사의 제품을 도입할 때 기술 제공 을 어떠한 방법으로 해줄 수 있느냐는 점을 중점적으로 따졌다.

한편 체신부는 전담반의 1차 검토 결과를 그해 7월 경제장관간담회에 보고했다. 경제장관간담회는 "현시점에서는 공간분할 전자교환방식 채택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이 있으므로 전자교환방식을 채택하고자 한다"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기종의 선정과 도입에 따르는 제반문제를 결정할 기구 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TDTF)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76년 9월 1일 발족한 TDTF는 체신부차관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의 차관보를 위원으로 하여 구성되었는데, 그후 10여년 동안 존속되어 전자교환기의 도입 은 물론 개발에 관한 정책까지도 다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주무부처인 체신부에서 결정하지 않고 정부 부처간 협의체를 구성하여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전자교환기 도입에 대해 체신부에서 찬성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어요. 생산업체 중에서도 한 사람도 없었구요. TDTF를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어요. 타부처와 협의해서 정부방침으로 결정하니까 되었던 거지, 체신부 내부 합의로 추진했더라면 안됐을 겁니다." 당시의 체신부차관 이경식의 주장이었다.

"외부에서는 체신부 사람들은 전부 금성이나 OPC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당시 실무작업은 경상현 박사가 맡아서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재익 박사 주도하에 모든 일이 이뤄졌어요. 그러다가 이경식씨가 체신부차관으로 온 뒤부터 체신부가 주도하기 시작했죠." 정도길 국장이 부연했다.

전자교환기의 도입에 관한 그 동안의 작업 결과는 TDTF의 검토를 거쳐 76년1 2월 8일 경제장관간담회에 회부되었는데, 그때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원칙이 결정되었다.

첫째, 채택할 기종은 단일 기종으로 하며 공급 규모는 80~84년간에 2백만회 선으로 한다.

둘째, 교환기의 생산업체는 교환기 본체의 조립 생산을 위하여 전액 산업은 행 출자로 1개 업체를 설립하고, 부품 생산업체는 완전 계열화하여 대상 업체를 공모한다.

셋째, 응찰 회사와의 협상 방향은 구체화된 조건으로 재입찰을 실시하여 수정안을 접수한 다음 1차 협상을 하여 2개사로 축소하고 체신부차관을 단장으로 하고 관련 부처에서 모두 참여하는 협상단을 구성한다.

넷째, 기술 도입 전담기구로 KIST 부설의 연구소를 설립한 다음 추후에 체신 부 산하의 연구기관으로 설립한다.

이러한 원칙은 며칠 후 박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얻음으로써 정부 방침 으로 확정되었다. 그 해도 저물어가는 12월 27일 장기익 체신부 계획국장은 남덕우 부총리, 장예준 상공부장관, 박원근 체신부장관, 오원철 청와대 경제 제2수석 등이 배석한 가운데 박대통령에게 앞에서 정한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몇가지 원칙을 브리핑했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경상현도 배석했다.

박대통령은 전자교환기 도입 원칙에 대해 분명하게 찬성의 뜻을 밝히고 나서이렇게 덧붙였다.

"전자교환기를 채택한다는 것은 전화만 잘 통하게 하고 값싸게 공급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배석한 각료들에게 그러한 방향으로 연결시키도록 지시한 다음 "통신기 술이나 전자기술을 도입할 때 단순히 물건만 들여와서는 안되며, 기술을 충분히 받아들여서 우리나라 기술자들에게 제대로 전수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다음 박대통령은 보고한 내용에 따라 참석자들에게 두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체신부측에 내린 지시로 전자교환기술을 전담할 연구소를 설립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상공부측에 산업은행 출자로 전자교환기 생산회사 를 설립하라는 것이었다.

두가지 지시사항은 즉시 이행되었다. 이미 경제장관간담회에서 결정한 대로연구소는 KIST 부설로 발족시킨 다음 입법조치가 이루어지는 대로 체신부 산하의 독립 법인체로 설립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박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지 불과 4일만인 76년 12월 31일에 설립된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였다. KIST의 기존 조직 중 계통공학연구실.방식기기연구실 의 기능과 경제분석실 기능의 일부를 합쳐 발족한 이 연구소의 초대 소장에 는 KIST 부소장인 정만영이, 부소장에는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김종연.안병성.경상현 등이 임명되었다.

또 하나의 지시사항인 전자교환기 생산회사의 설립은 상공부에 의해 추진되어 77년 2월 15일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KTC)라는 이름으로 발족했고, 사장 에는 한양대 공대학장과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한 이만영 박사가 임명되었다. 이 회사는 앞으로 도입할 전자교환기 본체의 조립.생산을 목적으로 한국산업 은행이 전액을 출자하여 국영기업 형태로 설립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회사는 출발 당시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자교환기와 같은 새로운 전자 제품의 생산은 기존 전화교환기 생산업체에 맡기거나 관련 제품의생산 경험 이 있는 다른 민간업체를 선정하여 맡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기존의 교환기 생산업체는 전자교환기의 도입 자체를 반대했고, 새로운 희망업체는 난립해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비능률이 뻔히 예상되는 국영기업 형태 로 출발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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