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작품만 잘 쓰면 됐지. 이 말은 수명을 다했다. 지금 스토리 시장은 작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작가는 원고지 뒤에 숨을 수 없다. 과거 행보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발언도, 일상의 태도도 흥행에 반영된다. 웹소설과 웹툰이 드라마와 게임으로 뻗어 슈퍼 IP가 되는 시대이니, 작가의 리스크가 곧 투자사의 리스크다. 실제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흥행 중인 한 드라마의 원작 웹툰 회사 대표가 과거 다른 작품에서 정치색을 암시했다는 의혹을 받은 적이 있다. 드라마가 화제를 모으자 그 의혹이 다시 소환됐고, 드라마 자체에 대한 불매 정서로까지 번지고 있다. 정작 그 드라마의 글과 그림은 다른 작가들이 맡았다. 회사의 얼굴이 흔들리자 실제로 쓰고 그린 사람들의 몫까지 함께 흔들린 것이다. 계약서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적혀 있어도, 시장의 정서는 계약서를 읽지 않는다. 정서는 조항으로 통제되는 게 아니라 여론으로 흘러간다. 이런 구조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대표 한 사람의 과거가 여러 작가의 몫까지 함께 흔드는 일은 앞으로 더 흔해질 수 있다. IP가 커질수록 흔들리는 반경도 함께 커진다.
여기에 통제하기 가장 어려운 회색지대가 하나 더 생겼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다. AI가 학습한 데이터에 저작권 침해나 혐오 표현이 섞여 있을 수 있는데, 디렉터가 걸러내지 않고 받아쓰면 나중에 법적 문제와 대중의 외면을 함께 맞는다. 가령 AI가 초안을 쓰고 작가가 다듬은 장면이 나중에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지금 계약서 어디에도 답이 없다. 신뢰의 파산은 그보다 무겁다. 작품이 크게 성공한 뒤에 작가가 자기 서사의 설계 의도를 설명하지 못하면 대필 의혹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건 커리어의 끝이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다음 작품으로도 회복되지 않는다. 독자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주지만, 의심이 남은 작가의 다음 작품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표절은 어디까지가 남의 것이었는지 다툴 수 있지만, 대필은 다툴 여지 자체가 없다.
필자는 6년 동안 작가와 계약하는 일을 했고, 한 해에 신규 계약만 30건에서 40건이었다. 계약서는 해마다 두꺼워졌다. 2차 저작권, 영상화 우선권, 해외 유통, 정산 주기 등 조항이 늘수록 서로 안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계약서를 계속 다듬은 이유는 있다. 다음에 벌어질 일을 미리 정해두면,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관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래 간 관계는 조항이 많아서 오래 간 게 아니라, 작가가 다음 작품도 우리와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어진 것이었다. 조항이 아무리 두꺼워도 다음 작품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까지 적을 수는 없었다. 계약서에 다 못 쓰는 게 있다. 그게 신뢰다. 6년 동안 이 조항들을 매번 새로 쓰다시피 했다. 산업이 바뀔 때마다 계약서가 먼저 낡았다. 낡은 조항을 고치는 속도가 산업이 변하는 속도를 못 따라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커진다. 나눠야 할 것이 원고료만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 어떤 도구를 썼는지, 그 결과물의 권리는 누구 것인지. 계약서가 따라가지 못하는 영역이 해마다 넓어진다. 창작자에게 이만큼의 책임을 요구한다면 플랫폼도 제 몫을 해야 하고, 원고를 받아 유통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AI로 정산을 투명하게 만들고 불법 복제를 실시간으로 잡아야 한다. 글로벌 동시 론칭을 위한 번역, IP를 다른 포맷으로 확장할 때의 리스크 점검, 여기에 AI를 써야 한다. 창작자만 무장하고 플랫폼은 그대로면 균형은 오래가지 못한다. 법과 제도가 기술을 따라잡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건 현장에서 바로 작동하는 자체 기준이다. 그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계약서에 못 담은 것은 계약 밖에서라도 지켜야 한다. 결국 플랫폼과 작가는 같은 배를 탄 사이지, 갑과 을로 나뉜 사이가 아니다. 신뢰라는 뼈대 위에서 기술을 부릴 때 성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신뢰의 끝에는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전대진 前 스토리위즈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