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히트펌프 용량기준, 산업계 보단 앞서가야

정부가 산업계와 대형 건축물의 청정 열사용 확대와 함께 녹색대전환(K-GX)을 위한 '히트작'으로 히트펌프 보급 확대를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탄소 중립과 전기화(Electrification) 병행 흐름 속에서 대형 건물과 산업 현장의 열에너지 구조를 바꿀 핵심 대안으로 히트펌프를 낙점한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정부 구상과 달리 정작 현장을 뒷받침해야 할 우리나라 시험·인증 체계는 굼뜨기 짝이 없다. 정작 산업계와 건물 수요자 쪽 용량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면서 심각한 괴리를 드러내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이 최근 예고한 물-물 수열원 히트펌프 국가표준(KS) 제정안만 보더라도 한계는 명확하다. 신규 표준의 정격 냉·난방용량 기준은 최대 2110㎾(약 600RT·냉동톤) 이하에 그친다. 현행 기존 표준이 150RT 이하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대상 범위가 넓어졌다지만, 실제 산업 현장의 요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미 지난해 한국무역센터에 국내 최초로 1000RT급 대용량 수열 히트펌프가 도입됐고, 제지업계 등 산업 현장에도 1000RT 이상급 대형 설비가 잇따라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4년 전 선행 연구 타령을 하며 600RT 수준에 묶어두는 사이 현장은 이미 1000RT 시대로 뛰어넘은 것이다.

시험·인증 기준의 공백은 심각한 정책적 부작용을 낳는다. 대용량 히트펌프는 추가 전력 설비 설치와 수전 인프라 재검토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통일된 공인 기준이 없으면 수요처가 소비전력과 효율을 동일한 조건에서 객관적으로 비교·검증할 수 없어 발주 및 전력 증설 규모 산정에 큰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굼뜬 국가 용량 시험·인증 확대는 결국 국내 히트펌프 확산에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향후 녹색산업 수출에도 심각한 지연을 가져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정부 판단에 따라 수소연료전지 등 대체 또는 경쟁 기술은 배제해 놓은 채, 히트펌프 마저 속도감 있는 인증 체계 구축이 안 된다면 감도 잃고 배도 놓치는 상황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국책 과제로 선정한 핵심 기술의 인프라 조차 제때 갖추지 못해 시장 선점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산업 현장이나 건물 실사용 설비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데, 언제까지 몇 해 전 실증이나 기술 완비를 외칠 것인지 의아해진다. 시험·인증 속도가 산업계 보폭에 앞서 제도 안착까지 바랄 순 없어도, 적어도 산업계 실사용 설비 보다는 앞서가야 한다. 표준과 인증이 현장의 발목을 잡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정부의 신속하고 전향적인 조치를 촉구한다.

Photo Image
히트펌프 구성 및 공정도.

이진호 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