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초연결과 초지능의 정점을 향해 달리는 디지털 문명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은 클라우드와 실시간 연동되며, 인공지능(AI) 비서는 비즈니스부터 개인 일정까지 촘촘하게 관리한다. 이메일에 적힌 날짜는 자동으로 캘린더 애플리케이션(앱)에 등록되고, 협업 툴은 약속 시간을 실시간 알림으로 상기시킨다. 망각이라는 인간의 고질적 한계를 디지털 인프라가 완벽히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완벽히 동기화된 사회 속에서도, 유독 기록되지 않고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약속들이 존재한다. 치열한 비즈니스 전선에서 매일같이 마주하는 대화들이다.
“조만간 식사 한 번 합시다.”
“조만간 제가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던지는 의례적 인사거나 다음을 기약하는 신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사소한 구두 약속들은 최첨단 알고리즘의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가 철저히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시스템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약속을 기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예의'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의도적인 망각의 이면에는 대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우월적 지위, 즉 갑을 관계의 심리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아쉬운 상황이거나 동등한 협력 관계일 때 말 한마디를 무겁게 인식한다. 시장의 진입자나 을의 위치에 서 본 이들은 안다. 을은 상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청신호로 받아들이고, 수일 동안 스마트폰을 보며 간절히 연락을 기다린다. 반면 우월적 지위, 즉 '갑'이 되는 순간 말의 무게는 급격히 가벼워진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무의식적 여유가 타인의 간절한 기다림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갑에게는 언제든 잊어도 좋은 공수표에 불과한 말이, 을에게는 미래가 걸린 절박한 기회의 문일 수 있다.
이러한 약속의 비대칭성은 개인 간 에티켓을 넘어 혁신 생태계 전체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한다. 영리 스타트업 환경에서 자본 권력을 쥔 갑들의 “긍정 검토 후 연락하겠다”는 구두 약속은 지독한 자원 왜곡을 낳는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며 사업 전환(피보팅)의 골든타임을 놓치거나 계약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비영리 스타트업이나 공익 단체의 현실은 더욱 뼈아프다. 정부 부처나 기업 담당자가 건네는 “조만간 방안을 논의하자”는 약속이 가벼운 망각으로 지워질 때, 활동가들은 극심한 무력감에 직면하며 공익적 안전망을 구축할 기회비용마저 상실한다. 결국 기술은 고도화되었으나 생태계를 지탱해야 할 기초 인프라인 '사회적 신뢰 자본'은 갑들의 가벼운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기화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첨단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이러한 위선과 선택적 망각을 가장 투명하게 폭로하는 거울이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AI 비서를 고용하고 일정을 동기화한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기본적인 존중이 거세되어 있다면 그 사회의 디지털 대전환은 결국 차가운 껍데기에 불과하다.
다양한 형태의 창업 생태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혁신가들을 만나며 필자가 늘 강조하는 것은 '신뢰의 스케일업(Scale-up)'이다. 비즈니스의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핵심 자산은,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정직한 신뢰 자산의 축적이다. 그리고 진정한 오피니언 리더, 즉 사회적 '갑'의 격조와 책임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증명된다.
본인이 우월한 지위에 있을 때 던진 사소한 약속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 테크놀로지가 알람을 울려주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보낸 기다림의 무게를 헤아려 먼저 손을 내미는 태도야말로 이 시대를 치유할 진짜 혁신이다. 기술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휴머니즘과 상생이어야 한다.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그 짧은 문장이 누군가의 타임라인에서 상처와 낭비로 남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의 마음속 캘린더를 타인의 절박함과 동기화해야 할 때다. 말의 무게는 결코 위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을 끝내 지켜내려는 성실한 태도에서만 비로소 성숙한 문명이 시작된다.
박정인 (재)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