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산업 현장 생산성을 높이고 일상의 편의를 바꾸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됐다. 하지만, AI가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선사할 진정한 가치는 다른 곳이 있다고 확신한다. 바로 기초과학이다. 수십년간 풀리지 않던 과학적 난제에 AI라는 새로운 엔진을 통해 돌파구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 흐름은 국가 경쟁력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2024년 단백질 3차원 구조를 예측하는 AI 모델 '알파폴드(AlphaFold)' 연구진의 노벨화학상 수상은 AI와 자연과학의 결합이 가져온 혁신의 전환점이었다.
반세기 동안 생물학계 최대 난제로 꼽히던 단백질 구조 예측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AI가 연구 보조 도구를 넘어 과학적 발견을 이끄는 핵심 수단임을 증명했다.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밝히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던 작업이 수분 안에 가능해졌고, 그 영향은 말라리아 백신 연구, 항암 치료제 설계, 신규 효소 개발 등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바이오를 너머 신소재 탐색, 기후 모델링, 천문학 등 과학 전 분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특히 최근 구글이 발표한 'AI Co-Scientist'는 한발 더 나아가, AI가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결과를 검증하는 지능형 자율 에이전트의 가능성까지 열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기초과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자명하다. 세상을 바꾼 혁신들은 모두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서 탄생했다.
열역학 원리가 없었다면 산업혁명을 촉발한 증기기관은 불가능했고, 전자기학의 확립이 전기 상용화로 이어져 인류의 밤을 밝혔으며, 화학 반응에 관한 깊은 탐구가 현대 모바일 시대와 전기차 시대를 움직이는 배터리의 탄생으로 귀결됐다. 튼튼한 뿌리 없이는 응용 기술의 꽃을 피울 수 없으며, 미래를 주도할 혁신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바이오 및 미래 산업의 핵심인 신소재 분야에서, LG AI연구원의 전문가 AI 시스템은 이미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 전적으로 연구자의 직관이나 수많은 시행착오에 의존해야 했던 실험 과정이 획기적으로 단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대한 병리 이미지를 정밀하게 분석해 암 발병을 예측하고 진단하는 엑사원 패스(EXAONE Path)는 의료 분야에서 AI가 질병의 고통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다.
나아가, 수많은 논문과 방대한 물질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물성을 예측하는 엑사원 디스커버리(EXAONE Discovery)는 신소재 발굴과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기존 방식으로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리던 탐색과 가설 검증의 시간을 AI가 대폭 단축하며,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본질적인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는 글로벌 기술 주권이 재편되는 전환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준비 상태를 냉정하게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응용 기술과 제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 근간이 되는 기초과학 역량은 늘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AI for Science' 시대의 도래는 이 격차를 압축적으로 좁힐 기회이기도 하다. 제한적 데이터만으로도 복잡한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방대한 가능성의 공간을 빠르게 탐색하며, 인간이 놓치기 쉬운 미세한 패턴까지 발견하는 AI의 능력은 기초과학 연구의 속도와 질을 근본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주요국들은 이 결정적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미국은 AI를 26개 핵심 과제에 투입해 연구 역량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제네시스 미션(Genesis Mission)'을 발표했고, 유럽연합(EU)도 회원국의 AI 자원을 결집해 과학기술 난제를 해결하는 '과학 분야 AI(AI in Science)'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범국가적 역량을 모아 추진하는 'K문샷 프로젝트'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8대 분야 12대 국가 미션에 AI를 활용해 과학기술 난제를 정면으로 해결하고, 2030년까지 연구 생산성을 2배로 끌어올리겠다는 이 전략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세 가지 핵심 조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첫째, 고품질 연구 데이터의 체계적 구축이다. AI 모델의 성능은 결국 데이터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 연구 기관, 대학, 민간 기업이 각각 보유한 실험 데이터, 임상 데이터, 소재 물성 데이터의 경계를 허물고, 이를 정제해 안전하게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과학 데이터 인프라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특히 바이오 분야의 유전체·병리·임상 데이터, 그리고 물리·화학 분야의 실험 데이터를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연구자들이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속히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터 공개를 정량 실적으로 인정하는 인센티브 체계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둘째, 전문 영역에 특화된 도메인 AI 역량의 확보다. 범용 AI만으로는 과학 연구의 깊은 영역에 도달하기 어렵다. 화학, 생물학, 물리학 등 각 도메인의 전문 지식과 물리 법칙이 AI 모델에 깊이 내재돼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가설을 세우고 새로운 발견을 이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재 각광받는 거대언어모델(LLM)만으로는 과학 연구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자 구조, 물질 물성, 유전체 서열 등 전문 데이터에 대한 정밀한 예측과 최적화를 수행할 수 있는 과학 특화 AI 모델에 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과제'를 통해 축적된 우수한 성능의 기본 AI 모델과 역량은 전문 영역 AI 개발을 가속하는 든든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산업 현장에서 검증된 전문가 AI 기술이 국가 기초연구 인프라와 유기적으로 융합될 때 시너지가 극대화될 수 있다.
셋째, 개방적 협력 생태계 조성이다. AI for Science는 단일 기관이나 기업의 힘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K문샷 프로젝트가 지향하듯, 산학연이 각자의 강점을 결합하고,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열린 생태계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연구에서 도출된 성과가 산업 현장에서 실증되고, 실증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경험이 다시 연구의 질을 높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연구와 실증이 분리된 채 각각 진행되면 기초과학의 혁신이 실질적인 산업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아울러 AI 기반의 국가 연구가 윤리적이고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신뢰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를 확립하는 일도 병행돼야 한다.

AI는 더 이상 일상의 편의를 넘어, 인류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자연의 원리를 밝히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난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과학적 발견의 새로운 엔진으로 진화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의 삶을 바꾼 위대한 발명은 언제나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AI가 이끄는 기초과학의 혁신은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를 재설계하는 거대한 동력이 될 것이다. 핵심 기술과 양질의 데이터, 우수한 인재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하나로 모일 때, 대한민국은 글로벌 AI 기초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주역이 될 수 있다. 지금이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 과감하게 실행에 나설 결정적 순간이다.
임우형 LG AI연구원장
〈필자〉 임우형 원장은 AI를 활용한 최적 의사결정 분야의 전문가로, 2020년 LG AI연구원 창립 멤버로 합류해 현재 연구소의 기술 전략과 실행을 리딩하고 있다. LG AI연구원의 핵심인 예측, 최적화, 추론 기술 고도화를 이끌며, 실험실의 연구를 넘어 산업 현장과 기업 경영에 즉시 적용 가능한 '전문가 AI 시스템' 개발에 주력해 왔다. 특히 시계열 예측, 이상 탐지, 강화학습 및 생성 모델 등 첨단 AI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며 LG그룹 전반의 인공지능 전환(AX)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LG AI연구원 합류 전에는 LG사이언스파크 AI추진단에서 데이터 인텔리전스 태스크 리더를 역임하며 그룹 차원의 AI 중장기 전략 수립에 기여했다. 이전에는 삼성전자와 SK텔레콤에서 'S Voice' 및 'NUGU' 등 국내외를 대표하는 AI 플랫폼 개발을 주도하며 모바일과 통신 분야의 AI 대중화를 이끈 풍부한 현장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