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16년째 반복되는 PLC 잔혹사, 스마트 충전기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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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더헤일로 대표

국내 산업계에서 전력선통신(PLC) 실효성 논란이 16년째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2014년 한국전력이 추진한 스마트그리드 원격검침인프라(AMI) 사업 당시 PLC는 통신 성능 저하, 업체 담합, 특허 분쟁으로 얼룩지며 국가전략사업 발목을 잡았다. 당시 사업 중단과 보완이 반복되며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수차례 질타를 받았던 PLC가 지금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18년에도 PLC 논란은 제기됐다. 한전 AMI와 전기차 충전기간 통신 간섭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국가기술표준원은 국제표준기구(ISO·IEC) 회의를 거쳐 완속 충전기를 제외하고 급속 충전기만 PLC를 적용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기후에너지환경부로 무대가 옮겨졌다. 완속 충전기에 PLC를 적용하겠다는 논란은 벌써 3년째다. 기후부는 2023년 화재 방지를 위해 충전기가 차량을 제어·감시하는 계획을 내놨고, 최근 한발 더 나아가 전기차 배터리를 국가 전력망으로 활용하는 V2G(Vehicle to Grid)까지 확장하겠다는 복안이다.

업계는 여전히 불안하다. 화재 방지를 위해 완성차 업체는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수십가지 데이터를 실시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시장 점유율 70%를 상회하는 현대차·기아와 테슬라는 보안과 전략적 이유로 정보 공유를 꺼리고 있다. 이미 10년이 넘는 시장 역사를 통해 고도화된 기술을 갖춘 전기차가 스스로 화재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점도 PLC 도입 명분을 약화한다.

V2G 현실성도 의문이다. 실제 구현하려면 모든 전기차에 양방향 온보드 차저(OBC)를 장착하고 운영 플랫폼(VPP)과 스마트 계량기 등 표준화와 전력 거래를 위한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한다. 현재 이런 준비는 없는데 하드웨어 PLC 모뎀의 장착부터 서두르는 형국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전력 수급이 가장 안정적인 나라다.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제조업 추이를 종합하면 단순히 '전력이 부족할 수 있다'는 막연한 가정만으로 V2G를 밀어붙이기엔 무리가 있다.

별도 시스템 없이 전기차만으로 사용 가능한 V2H(Vehicle to Home)와 V2L(Vehicle to Load) 같은 대안도 충분하다. 2019년 태풍 하기비스로 인한 대규모 정전 당시 일본에서는 닛산 리프의 V2H 기능을 활용해 비상 전원을 공급했다. 굳이 전력망을 통제하지 않아도 차량 기술만으로 재난 대응과 에너지 효율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피해는 소비자 몫이다. 2023년 이후 충전용 전기 요금은 동결됐지만 실제 충전 요금은 3년 만에 두 배 이상 오른 300원 수준이다. 여기에 PLC 모뎀을 장착하면 50~60만원 수준이던 완속 충전기는 100만원까지 치솟는다. '스마트 기능'이라는 명목하에 발생한 불필요한 비용 부담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구조다.

이런 정책 탓에 최근 국민청원에는 5만1854명 시민이 동참하며 정책 재검토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현재 기후부 정책은 과거 한전 AMI 사업 실책을 연상하게 한다. 세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 이해 관계자 위주로 구성된 협의체가 정부 규정을 정하는 상황도 판박이다. 다른 국가가 서두르지 않는 PLC 도입을 왜 우리만 서두르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유럽조차 2027년 의무화를 추진 중일 뿐 구체적 규정은 나오지 않았다. 기후부는 과거 AMI 사업이 남긴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지금이라도 현장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태준 더헤일로 대표 gaius.bak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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