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호 100대사건]〈25〉 케이블TV 본방송

케이블TV는 '뉴미디어의 총아'로 불리며 1995년 3월 개국했다. 당시 48개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가 24개 채널을 갖추고 9만여 가구 대상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케이블TV는 국내 첫 유료방송 시장 개척과 함께 초고속 인터넷 강국을 구현하는 촉매제가 됐다. 트리플플레이서비스(TPS)로 방송·통신 융합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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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케이블TV 개국 당시 케이블협회에서 발간한 잡지 (사진=전자신문DB)

케이블TV는 초기 준비 부족과 정책 혼선으로 표류하기도 했다. 1995년 1월 5일 시험방송에 이어 3월 1일 본방송을 시작하기까지 전송망 구축 미비와 컨버터 공급 지연 등으로 예정된 개국 일정에 맞춰 방송을 실시할 수 있을지 우려가 컸다. IMF로 인해 좌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방송 시작 직후에는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적지 않은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과 누적되는 적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결국 1996년 말 제일방송(JBS)이 홈쇼핑채널인 삼구쇼핑으로 넘어갔다. 이는 PP 구조조정 신호탄이었다. 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치면서 새그린TV(진로그룹), 다솜방송, 기독교TV 등 부도 위기에 내몰린 곳이 속출했다. 캐치원(삼성), 현대방송(현대), DCN(대우) 등 대기업도 줄줄이 시장을 떠났다.

이후 정부는 2001년 PP를 등록제로 전환하고, 복수방송채널사용사업자(MPP)가 등장했다.

케이블TV는 초기 준비 부족, 정책 혼선에 IMF까지 겹쳐 위기를 겪었지만 1500만 가입자를 확보하며 국민에게 가장 친숙한 방송 매체로 자리잡았다. 난시청 지역 해소라는 큰 업적도 남겼다.


배옥진 기자 witho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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