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44〉한국 과학기술 산실 'KIST'…통합 8년 5개월 만에 독립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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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장관과 박원희 원장, 이한빈 위원장(오른쪽부터)이 1989년 6월 30일 KIST 현판식을 갖고 있다. (사진 KIST 제공)

해법은 분리 독립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사와 연구 기능을 분리 독립시키겠습니다.”

1988년 4월 12일 이관 과학기술처 장관은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주요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으로 바람 잘 날이 드물던 KAIST 분리의 첫 신호탄이었다.

이보다 앞선 1988년 2월. KAIST 책임연구원 66명과 선임연구원 120명 등 과학기술 두뇌 186명이 KAIST 연구와 교육 기능을 분리해 과거처럼 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환원시켜 줄 것을 골자로 한 건의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했다.

이들은 건의서에서 “설립 배경과 기능이 다른 두 기관을 통합해 연구 분위기를 위축시켜 우수과학기술 두뇌의 사기 저하를 초래했다”면서 “현재 충남 대덕으로 이전할 학사부와 연구부를 완전 분리, 과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같은 체제로 환원해 미래 한국과학 기술 발전을 이끌어 갈 원천기술 연구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왜 이 같은 KAIST 분리 독립 요구가 나왔는가. 잠시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보자.

1981년 1월 5일. 제5 공화국은 논란 속에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AIS)을 통합해 KAIST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초반 운영은 이원체제였다. 원장 아래 연구담당과 학사담당 부원장을 두었다. 연구담당 부원장은 기술연구소 업무, 학사담당 부원장은 교육업무를 각각 담당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지향점이 다른 두 기관을 통합해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졌다. 갈등의 씨앗은 날이 갈수록 더 자랐다. 조용한 날이 드물었다.

과학기술처 당시 법무담당관인 변명섭 전 과우회 사무총장의 회고.

“통합해 새로 탄생한 KAIST는 법적으로는 단일기관이지만 운영은 학사부문과 연구부문 이원체제로 운영했습니다. 시일이 지나면서 갈등이 하나 둘 불거지기 시작했어요. 기관 명칭을 놓고도 대립했고, 심지어 원장실 위치를 놓고도 진통을 겪었습니다. 명칭과 관련해 교수들은 '한국과학원'을 고수하고 연구원들은 설립 배경이나 국제 인지도를 볼 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몇 분 교수들이 중재안을 냈어요. '한국과학원'에 '기술'을 넣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구소'를 빼고 '원'을 추가해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영문 명칭은 'KAIST'로 정했습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교수와 연구원 직종 통일 문제, 논문 평가방식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과학기술처 관계자의 말.

“그러다가 5공화국 말 KAIST 연구본부에서 학사부문과 분리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복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6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연구원들이 이런 내용의 진정서를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부가 KAIST 분리 독립을 결정했어요.”

1988년 6월 13일 과학기술처는 KAIST 연구와 학사 분리 독립 지침을 마련했다. KAIST 연구부는 이 지침에 따른 분리 독립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KAIST 연구본부는 9월 23일 오후 1시 30분부터 국제회의실에서 '2000년대 KAIST 연구본부의 새 방향 설정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에는 과학기술정책과 정부출연연구소의 역할(박승덕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조정실장), 선진국의 첨단산업기술개발동향과 우리의 대응(이상희 민정당 국책연구소 부소장), KAIST 연구본부의 당면과제와 새로운 연구동향(박원희 KAIST 연구본부 소장) 등에 대한 주제발표에 이어 전문가 13명이 토론을 했다.

박승덕 실장은 주제 발표에서 “KIST는 대학과 민간연구소, 정부출연연구소 사이에서 역할과 기능을 재정립하고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희 부소장은 “연구본부는 정부가 담당해야 할 대형복합연구과제와 공공복지기술, 중소기업 기술지원 등에 주력해야 하고 대학과 민간연구소를 잇는 교량 역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희 소장은 “과학기술처와 연구과제별로 맺는 특정연구계약 방식을 일괄계약제로 개선하고 연구자 육성 확보를 위한 책임경영제 실시, 기본 인건비와 운영비 전액 지원, 독립연구기관으로 법률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면서 “연구본부는 초전도재료 바이오칩, 복합신소재 개발 등 미래형 산업기술을 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처는 1988년 12월 KAIST 대덕 이전을 확정했다. 정부는 독립한 연구부는 서울에서 국책연구를 수행하고 학사부는 충남 대덕으로 옮겨 과학기술대와 통합해 학사와 석사, 박사로 이어지는 영재교육을 담당토록 결정했다.

이듬해인 1989년 4월 25일 과학기술처 최영환 차관이 기자간담회를 열고 KAIST 분리 독립에 대한 방침을 밝혔다.

최 차관은 이날 “KAIST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분리하고 KAIST 대학원 과정과 과학기술대학 학사과정을 통합한다”고 밝혔다.

최 차관은 “경제차관회의에 이어 5월 경제장관회의와 국무회의에 이 같은 분리 통합 건을 상정해 이를 획정짓기로 부처 간에 합의했다”면서 “두 기관의 분리 독립 후 애초 방안인 KAIST법 개정이나 특별법 제정이 아니라 특정연구기관 육성법 시행령을 고치는 방안으로 추진키로 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처 당시 관계자의 말.

“한국과학기술원을 종전 명칭인 한국과학원으로 환원하면 새 특별법을 제정해야 했습니다. 부처 간 협의와 국무회의, 국회 통과 등 절차가 복잡했어요. 그래서 명칭 변경 없이 KAIST를 그대로 사용하고 독립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원'으로 변경키로 결정했습니다.”

1989년 5월. 과학기술처는 새로 출범할 KIST에 대한 정부 지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특정연구기관육성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KIST를 제1호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했다.

이 시행령은 1989년 7월 4일 대통령령 제12748호로 공포했다. 별도의 특별법 제정 없이 시행령 개정으로 KAIST 분리 독립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1989년 6월 12일 과학기술처는 재단법인 KIST 설립을 허가하고 초대 원장에 박원희 KAIST 연구본부 소장을 임명했다.

박원희 초대 원장은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한양대 교수를 거쳐 KIST에서 책임연구원과 시스템연구담당 부소장, KAIST에서 연구본부 소장 등을 역임했다.

박 원장은 이날 “KIST는 과거 모방 연구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특히 모든 기술혁신의 핵심인 신소재 연구개발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KIST는 또 이한빈 전 경제부총리, 유창순 전국경제인엽합회장(전 국무총리),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박태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을 설립자로 해서 재단법인 등기를 끝냈다.

이 가운데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감회는 남달랐다. 최형섭 전 장관은 1966년 초대 KIST 소장으로 취임해 연구소를 불이 꺼지지 않는 한국 과학기술 산실로 육성한 한국 과학기술계 대부였다. 이어 1971년 과학기술처 장관에 취임해 7년 6개월이란 한국 최장수 장관으로 재임했다.

최 전 장관은 생전에 “생애 가장 큰 보람은 KIST와 KAIST 설립”이었다고 회고했다.

통합한 KIST가 8년 5개월 만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최 전 장관은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1년 KIST와 KAIS가 합쳐져 KAIST가 탄생한 후 KIST는 큰 수난을 겪었다. 이 기간에 유능한 연구원들이 줄지어 KIST를 떠났는데 초창기 연구원들이 일부 남아 이들을 주축으로 노력한 결과 드디어 1989년 KIST는 KAIST에서 분리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1989년 6월 30일. KIST는 이날 온통 잔칫날 분위기였다.

오전 10시 KIST는 개원식과 취임식·현판식을 갖고 새롭게 출범했다. 개원식에는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 이한빈 설립위원장,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박원희 원장은 취임사에서 “그동안 축적한 연구 능력을 토대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원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한국 과학기술 산실인 'KIST'의 화려한 새출발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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