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만화·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30여 편 투자 지원 한 인물
'국내 문화예술 발전의 지렛대' 자처
문화·예술가의 헌신 기억해야 프랑스처럼 발전
K-팝과 드라마, 영화, 웹툰 등 K-콘텐츠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는 많은 문화, 예술가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초이크리에이티브랩 최신규 대표는 '국내 문화예술 발전의 지렛대'로 불린다. 당장 눈앞의 수익보다는 투자와 지원을 통해 만화·애니메니션 콘텐츠 생태계 활성화에 역점을 뒀기 때문이다.
완구 회사 '손오공'을 설립 후 '장난감 대통령'으로 불린 최 대표는 1990년대 '영혼기병 라젠카', '용가리', '하얀마음 백구' 등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0여 편이 넘는 국내 만화와 애니메이션 콘텐츠 제작을 지원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최근 그가 한국만화가협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그간 행적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남다른 만화와 애니메이션 사랑이 화제가 됐다.
최신규 대표는 “어릴 적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녔지만 박기정의 '도전자', 손의성의 '동경4번지', 신동우의 '삼국지' 같은 만화를 보면서 자랐다”며 “내가 현재 콘텐츠를 마음껏 만들어 내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 만화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약 20년 동안 국내 만화와 만화가를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일련의 지원 사업 중 하나가 지난 2019년 별세한 고 김성환 화백의 만화인장 후원이다.
이에 대해 최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금의 문화강국이 된 데는 만화가를 비롯해 많은 문화, 예술가들의 헌신이 있었다”며 “앞으로 프랑스를 넘어설 만큼 문화·예술을 키우려면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기여와 의미를 인식하고,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김성환 화백의 만화인장 후원은 그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향후 국내 콘텐츠가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소프트웨어는 물론 하드웨어까지 과감한 투자와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프로젝트에 실패하더라도 그 때 육성된 인력들이 미래를 이끌어갈 인적 자원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일 최신규 대표와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K-콘텐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근 만화가 단체인 한국만화가협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동안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만화는 문화와 예술 및 산업의 각 분야에서 상상력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왔다. 내가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 완구, 음악 등의 원천 역시 만화다.
어릴 적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녔지만 박기정의 '도전자', 손의성의 '동경4번지', 신동우의 '삼국지'같은 만화를 보면서 자랐고 내가 현재 콘텐츠를 마음껏 만들어 내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 만화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약 20년 동안 국내 만화와 만화가를 지원했다.
-만화가 외에도 문화, 예술가들도 지원한 것으로 안다. 어떤 철학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지금의 문화강국이 된 데는 만화가를 비롯해 문화, 예술가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화강국인 프랑스를 넘어설 만큼 문화·예술을 키우려면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기여와 의미를 인식하고,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고 김성환 화백의 장례식이 만화인장으로 열릴 수 있도록 후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지원·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어떤 작품들이 있고 이 중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사실 2000년 이전만 해도 국산 애니메이션이 많지 않았다. 한국 만화의 발전을 위해 1997년 '영혼기병 라젠카'의 투자를 시작으로 SBS TV에서 방영된 '스피드왕 번개', '붐이담이 부릉부릉', '하얀마음 백구' 등 총 30여편이 넘는 작품의 투자 및 제작에 참여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옛 주인을 찾아 천리길을 찾아온 진돗개 백구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하얀마음 백구'다. 당시 정감 넘치는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 화제가 됐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애니메이션에 투자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당시 문화예술적 역량을 한층 높인 콘텐츠 제작에 대한 투자를 시도했다. 이를 통해 우수한 애니메이션 감독과 애니메이터들을 육성하고자 했다. 거기에 우리 만화와 애니메이션 콘텐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작된 것들이 TV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와 KBS 'TV동화 행복한 세상', 극장용 애니메이션 '오세암' 등이다.
특히 '오세암'은 2004년 세계 최고 권위의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프랑스 앙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콘텐츠 제작지원 이외에도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이야 매년 애니메이션과 만화, 캐릭터가 모여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다양한 축제가 열리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런 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콘텐츠를 만드는 작가, 기업,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가는 문화 축제의 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과 만화 축제인 SICAF다.
SICAF 설립 단계부터 집중적이고 과감하게 투자를 진행했고 그 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그 역할을 한 것뿐이다.
-2000년대 초반 한일합작으로 탑블레이드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다.
▲'탑블레이드'는 기획 단계부터 한·일 간 시각차가 컸다. 일본 측은 주인공들이 기모노를 입길 바랐고, 배경도 일본풍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을 설득해 지구촌 어린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배경으로 바꾸었고, 그 덕분에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과거 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업체라는 편견이 있었다. 이를 깨기 위한 노력도 있었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엔딩 크레딧에 스태프 이름이 올라가는 거다. 특히 과거 일본 애니메이션에 한국인 스태프 이름이 들어간 사례가 없었다.
앞서 말한 '탑블레이드'의 경우 엔딩 크래딧에 한국인 스태프 이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프로젝트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전달했고 결국 관철됐다.
이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자존심을 세우고 한국이 더 이상 일본의 하청 업체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총감독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일본과 미국 작품에 비해 주목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헬로카봇', '터닝메카드' 등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총감독과 OST의 작사·작곡을 맡았다. 그간의 경험을 비춰볼 때 3D 애니메이션 시대가 도래한 이후 국산 애니메이션이 유명 외국 작품들과 극장에서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누가 더 잘 만드냐의 문제일 뿐이다.
-완구 제조사 대표에서 콘텐츠 제작자와 총감독을, 이외에도 게임,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 사업을 진행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추구한 방향이 있을 것 같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내가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내고 싶었다. 그동안 못한 것을 머릿속에 남겨놓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다.
미래의 키워드는 'AI'와 '융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가진 모든 문화·예술적 기반과 노하우를 잘 융합시킨다면 아름다운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향후 국내 콘텐츠가 더욱 성장과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듣고 싶다.
▲우리나라 콘텐츠들도 문화예술적 완성도까지 갖춰야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까지 과감한 투자와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나 기업들이 콘텐츠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프로젝트에 실패하더라도 육성된 인력들이 미래를 이끌어갈 인적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롤 모델이 있다면 누구인가.
▲가장 먼저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다. 콘텐츠업을 시작할 때부터 '한국의 디즈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도 그 꿈은 놓아본 적이 없다.
문화·예술가 중에서 존경하는 이는 설치미술가 백남준이다. 그의 미디어아트는 엔지니어들과 협업하며 최신 기술을 해체, 활용해 문화·예술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고자 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나에게 백남준은 기술과 문화예술을 접목한 길을 개척한 선배 같은 분이다.
이상원 기자 slle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