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주권, 에너지 주권은 한 시절 논쟁의 중심이 된 키워드이며,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핵심 소재였다. 식량 주권은 자유무역협정(FTA) 도입 당시 쌀 수입과 관련해 국민적 논쟁거리였으며, 에너지 주권은 동해 유전 개발, 탈 원전, 희토류 사태 등 자원 관련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단골로 언급되는 이슈다. 이러한 주권 문제는 국제 정세가 변화하거나, 세계적인 위기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가의 안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 의해 사회적 관심사항으로 조명 받고 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소버린 인공지능(Sovereign AI)의 중요성을 주창하고 있다.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독자적인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소버린 AI가 필요한가? 우리는 소버린 AI라는 개념이 이해당사자들이 본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미사여구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해외 동향을 살펴 보자.
지난해 초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에서는 사내 메신저 시스템이 해킹돼 고객 데이터와 대화 내용이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최근에는 GPT-4를 구성하는 핵심 알고리즘과 아키텍처가 유출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오픈AI가 미 국가정보국(NCA:National Security Agency)과 밀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근 오픈AI는 국가안보국 국장 출신인 폴 나카소네(Paul Nakasone)를 이사회 멤버로 영입하면서 워싱턴과의 밀월관계를 공식화했다. 범용 인공지능(AGI:Ari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초인공지능(ASI: 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기술이 비우호 국가에 유출되는 것을 정부의 힘을 빌려서라도 막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지난 6월 오픈AI의 핵심 인물이었던 레오폴드 아센브레너(Leopold Aschenbrenner)는 '상황 인식'(Situational Awareness)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AGI·ASI 개발은 미국 내에서 이뤄져야 하며, 중국, 러시아 등 적성국에 핵심 기술이 유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AI 경쟁은 기후변화 의제보다 중요한 '체제 경쟁'의 이슈이며, 핵심 기술이 비우호 국가에 유출될 경우 핵무기를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중국은 국산 AI 반도체를 구매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AI 인재를 자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AI 주권 확보를 위해 'AI 인해전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또 중국은 작년 10월 발표한 생성형 AI 보안 지침을 통해 중국 내에서 제공되는 AI 서비스에 사회주의 체제 전복, 국가 이미지 훼손 등의 정보가 포함되지 못하도록 명문화했다. 사실상 해외 빅테크 기업이 중국 내에서 생성형 AI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도록 막은 것이다.
소버린 AI는 G2만의 이슈가 아니다. 프랑스는 유럽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자체언어모형인 '르 챗'을 출시한 미스트랄AI를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AI법(AI Act)을 통해 역내 기업은 보호하고, 미국 기업을 규제하는 이중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EU AI법은 겉으로는 AI 윤리와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자국 내 AI 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최근 불거진 네이버의 '라인 지배구조 사태'를 보면 소버린 AI를 둘러싼 일본의 입장을 유추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을 이유로 라인의 지배구조를 바꾸라고 행정지도를 내린 바 있다. 하지만 라인플러스가 보유한 라인 메신저에는 AI 모델의 근거가 되는 대량의 학습용 데이터와 개인 정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이 조치를 소버린 AI와 연계해 해석한다. AI 시대에 한 발 뒤쳐진 일본이 단숨에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돌파구로 여기는 것이다.
식량 주권, 에너지 주권만큼이나 '데이터 주권' 'AI 주권'은 중요하다.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AI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버린 AI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진정한 AI를 만들기 위한 3가지 요소를 지원해야 한다. AI 알고리즘을 만드는 인재 양성, 물적 기반이 되는 학습용 데이터 확보, AI 반도체와 전력을 포함 IT 인프라가 그 대상이다.
우리는 자본력에서 월등한 해외 빅테크 기업에의 기술 종속은 향후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AI 패권 시대로 전환되는 지금이 바로 AI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적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황보현우 홍콩과기대(HKUST) 겸임교수·전 하나금융지주 그룹데이터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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