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은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 저서에서 유래된 말로,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정 분야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하며, 매출이 40억달러(약 4400억원) 이하인 중소·중견기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일은 어린아이들이 즐겨먹는 곰돌이 젤리, 백색가전 등 소비재에서부터 산업용 진공펌프, 얼마 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방문한 자이스(ZEISS)의 광학시스템 등 기업간거래(B2B) 제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히든 챔피언 기업을 발견할 수 있다.
대만도 중소기업 천국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경쟁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에버라이트라는 기업은 발광다이오드(LED) 분야에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본, 미국, 유럽 등 각지에 제품을 공급하며 세계 LED 시장 내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2017년 삼성전자 인수설이 나왔던 플레이나이트라이드, 에피스타까지 이들 기업은 마이크로 LED 칩 제작 경쟁력으로 각국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는 대만 정부의 중소기업 우선정책과 대만 업체들의 적극적인 기술 및 제품 개발, 시장 개척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필자가 몸담았던 대한민국 산업 정책 기저에도 월드클래스 300 정책처럼 국내 히든 챔피언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일관된 골자였다. 하지만 이미 시장 지배력이 있는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힘겨운 경쟁, 폐쇄적인 수직계열화로 인한 제한적인 국내 판로, 가업승계를 가로막는 조세 체제, 중견기업으로의 약한 성장 사다리 정책 등 여러 요인이 히든 챔피언을 육성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를 개선하려는 민관의 노력은 있었지만, 진전은 더뎠다. 디스플레이 산업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지난 17년간 디스플레이는 세계 1위를 유지했음에도 디스플레이 제조과정에서 이 회사 제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만한 세계적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디스플레이는 다른 업종과 달리 한국과 중국 등 2개 국가가 세계시장의 80%를 차지하며 세계 1, 2위를 경쟁하고 있는 분야다. 두 국가 시장만 집중 공략한다면 손쉽게 히든 챔피언 소부장 기업을 배출할 수 있는 유리한 시장 구조다.
이를 입증하듯 국내 디스플레이 소부장 업계는 작년에 국산화율 71%를 달성하며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화소를 디스플레이 기판에 입히는 증착기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선제적으로 기술력을 확보한 일본기업이 해당 시장을 독식해왔다. 그간 국산화를 위한 시도는 있어왔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속적인 연구개발(R&D) 지원과 업계의 특화된 경쟁력에 힘입어 디스플레이 증착기 분야 '히든 챔피언'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국내 기업인 선익시스템과 아바코는 OLED 해외 양산라인에 장비 공급업체로 낙찰되었다는 소식으로 국내외 업계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선익시스템은 2013년 6세대 증착기 개발에 성공하고 3년 뒤 국내기업에 양산 공급 이후 수년간 수주를 이어오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도 끊임없이 OLED 증착기 연구개발을 이어온 결과 일본 기업이 독점해 온 증착기 분야에서 해외 기업에 첫 공급하는 국내기업이 됐다. 약 1조원 규모 OLED 증착기 시장은 그간 일본 캐논토키사가 12년간(2012~2023년) 매출액 1위를 차지했는데, 이번 OLED 증착기 공급이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 OLED 증착기 시장에서 일본 장비사 독점구조를 깨트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밖에도 OLED 소재시장에서는 국내기업 덕산네오룩스가 OLED 발광재료 중 하나인 프라임 소재 분야에서 독일의 머크, 일본 이데미츠코산 등 유수 소재 기업을 제치고 약 44%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며 히든 챔피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국내 시장 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에도 소재를 공급하며 시장을 넓혀온 것이 주된 배경이다.
지몬 박사는 '시장을 깊고 좁게 팔 경우 시장이 작아질 수 있다'며 히든챔피언이 되는 비결 중 하나로 기업은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자국 시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시장을 적극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기업 사례를 보듯 히든 챔피언의 선결조건은 독자적인 기술 및 제품경쟁력 확보와 적극적인 해외 판로개척이다.
특히 국내 디스플레이 장비 업체들은 전방 산업인 패널 업체 투자 사이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호황기 패널 업체들의 신규 라인 투자가 유일한 성장 동력인 수주 산업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더더구나 해외시장 개척이 필요하다.
그동안 특정국에 의존해오던 증착기 분야는 국내 기업이 정부 연구개발 지원을 기초로 해서 자체 경쟁력을 쌓아 해외시장 진출이라는 결실을 얻은 만큼, 국내 기업 입지가 미미한 차기 핵심 품목에 대한 지속적인 기술개발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디스플레이 화소를 끄고 켜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박막트랜지스터(TFT)의 밑그림인 전자회로 패턴 형성에 사용되는 노광기도 일본 2개 기업이 시장을 100% 독점하고 있다. 과거에 정부 지원을 통해 국내 기업은 TFT 노광기 개발을 시도했으나 특허 회피와 원천기술 확보 등 높은 진입장벽으로 국산화에 실패한 바 있다.
핵심장비라고 하는 노광기, 증착기가 전체 장비시장 규모 약 54%(2022년 기준, OLED·TFT 합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을 고려할 때 개발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특히 노광기의 경우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마이크로 LED 양산이 본격화되면 디지털 노광기가 주력장비가 되므로 시급히 장비 국산화 진행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정부는 최근 OLED 분야 세계 최고 기술 확보와 핵심 소부장 품목 자립화 등을 위해 디스플레이 R&D에 올해 약 1910억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디지털 노광기와 노광기에 들어가는 핵심광원 모듈 개발 지원도 포함돼 있는데, 이는 노광기 분야에서 또 하나의 히든 챔피언 기업을 배출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디스플레이 패널기업이 기술적 우위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장 기회를 포착하며 글로벌 1위 기업이 된 것처럼 디스플레이 소부장 기업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 길목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퀀텀점프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지원과 해외시장 확대 대책이 있기를 희망한다.
이동욱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ldw@kdia.org
〈필자〉 이동욱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1990년 제34회 재경고시에 합격한 후 30년간 공직에 몸 담았다. 연세대 경영학 학사, 서울대 행정학 석사, 건국대 국제무역 박사를 거쳤다. 2009년 지식경제부(現 산업통상자원부) 성장동력정책과장을 맡아 '산업융합촉진법' 제정 등 신산업장출정책을 총괄한 바 있다. 2017년에는 중견기업정책국장으로 재직하며 기업 구조의 성장사다리 마련을 위한 중견기업 육성 정책을 이끌었다. 2022년 3월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