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일은 태산인데 사람은 없고….”
전산망조정위원회가 김성진 위원장 체제로 출범했지만 정작 실무를 담당한 부서가 없었다. 부서가 없으니 인력도 없었다. 그동안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청와대 과학비서관이 간사직을 맡아 행정을 처리했다. 1987년 7월 15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차 국가전산화확대회의 이후 사무국 설치는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정보고속도로라고 부르는 국가전산화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다가올 정보화 시대에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국가전산화 사업을 신속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7월 22일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사무국 설치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이 안에 따르면 사무국은 사무국장 아래 제1반과 제2반으로 구성키로 했다. 제1반은 전산망사업, 제2반은 전산화사업을 각각 담당키로 했다.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사무국 설치와 관련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안 전산망조정위원회에 별도의 실무 조직 설치 △2안 전산망법상 주무 부처인 체신부 내에 사무국 설치 △3안 한국전산원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관련 부처에서 인력을 파견받는 안이었다.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 가운데 3안을 채택했다. 사무국 직원은 해당 부처와 기관 등에서 파견받기로 했다. 정원은 15명.
전두환 대통령은 10월 22일 이 같은 전산망조정위원화 사무국 설치 운영계획을 재가했다.
전 대통령은 10월 24일 청와대 정홍식 경제비서실 행정관을 부이사관으로 승진 발령했다. 당시 일반직 고시 출신이 청와대 내부에서 비서관급인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일은 그가 최초였다. 인사 발령에 대통령이 최종 재가를 하는 일도 극히 이례적이었다.
9월 10일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적선동 한국전산원 사무실 6층에 사무국을 마련했다. 사무국에는 체신부·과학기술처·총무처·문교부·상공부·내무부 등에서 파견 나온 서기관과 사무관급 엘리트 공무원, 한국은행·한국데이터통신 등에서 파견한 우수 인력 등 12명이 근무했다.
사무국장은 청와대 홍성원 과학기술비서관이 겸임했다. 이유는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들의 효율적인 관리와 부처 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89년 4월 홍성원 비서관이 청와대를 떠나자 정홍식 비서관이 사무국장을 겸직했다.
12월 2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듬해 2월 25일 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정국은 어수선했다.
당시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가전산화 추진체계 발전방안을 마련했다. 5공화국 정부는 뿌리가 같았던 6공화국에서 정보화와 정보산업 관련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를 희망했다.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런 염원을 담은 3개 방안을 준비했다.
제1안은 부총리급의 중앙부처 신설이다. 가칭 국가전산기획원을 신설해 관련 부처의 국가전산화 및 정보산업 관련 정책 기능을 일부 흡수한다는 것이다. 제2안은 기존 부처를 개편하는 내용이다.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한다는 구상이었다. 제3안은 대통령 비서실에 국가전산화와 정보산업담당 특별보좌관 또는 수석을 신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경우 기존 부처 기능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전산망조정위원회 사무국은 대통령 비서실 소속으로 유지키로 했다. 이것이 어렵다면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체신부로 이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안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 업무에 관여한 A씨의 기억. “6공화국 정부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장 5공화국 비리 등으로 눈을 다른 데로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1988년 8월 23일 노태우 대통령은 전산망조정위원장을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변경했다. 김성진 위원장이 과학기술처와 체신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민간인이 현직 차관들로 구성한 위원회를 주재한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 주체를 놓고 관련 부처 간 샅바싸움은 치열했다.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등 이 사업과 관련이 있는 부처들이 저마다 자신들이 주관 부처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같은 사안에 대해 두 번 재가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전산망조정위원회 주관 부처 이관을 둘러싼 혼선 과정을 보자.
1989년 3월 6일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마련한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 개편방안을 재가했다. 재가 내용은 “그동안 대통령 비서실에서 전산망조정위원회를 주관해서 국가전산망사업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제는 행정부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조정돼 위원회를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운영토록 개편하고자 한다”였다. 주관 부처를 과학기술처로 변경키로 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실세로 불린 문희갑씨였다. 기안자는 구본영 경제비서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과학기술비서관실은 발칵 뒤집어졌다. “어째 이런 일이….” 담당 비서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은 2007년에 펴낸 자서전 '한국IT정책 20년'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기술비서관도 모르게 노태우 대통령이 결재를 한 바 있다. 과학기술처의 요청에 따라 정보기술(IT) 정책을 잘 모르는 매크로 담당 비서관들이 건의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만일 그 결재대로 진행됐다면 우리나라의 정보화는 과학기술처가 주도했을 것이다.”
체신부도 비상이 걸렸다. 이 시간에 신윤식 체신부 차관도 위원회가 과학기술처로 넘어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회장(당시 체신부 차관)의 당시 상황 설명. “체신부로 오기로 한 위원회가 느닷없이 과기처로 가다니 말이 됩니까? 즉시 문 경제수석에게 면담을 신청했어요.”
신윤식 차관은 문희갑 수석과 공군장교로 근무할 때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고시는 문희갑 수석이 후배이지만 군에는 먼저 입대해 신윤식 차관이 공군 소위 시절 문희갑 수석은 중위였다.
그런 인연으로 신윤식 차관이 우정국장 시절 문희갑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우편작업 기계화 등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자 문희갑 실장에게 1시간여에 걸쳐 사업의 필요성을 브리핑, 예산을 3배나 늘린 일도 있었다.
“알고 보니 문희갑 수석 부친이 대구 지역에서 35년 동안 우체국에서 근무했답니다. 우체국장 관사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우체국 돈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했어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였다. 문희갑 수석은 장관급인 데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교 동문으로, 청와대 실세로 통했다.
“아니 체신부로 오기로 된 위원회를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체신부에서 일을 다 한 것 아닙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문희갑 수석도 화를 벌컥 내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청와대에는 바보만 있단 말입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지 이게 뭡니까.”
감정을 삭인 신윤식 차관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문희갑 수석에게 부당함을 설명했다.
이 일이 있은 후 4월 하순 총무처, 상공부, 과학기술처, 체신부 등 4개 부처 차관은 모임을 갖고 위원회를 체신부로 이관하기로 합의했다. 기존 결정을 180도 뒤집는 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해 5월 앞서 재가한 이전 기관을 다시 체신부로 바꾸는 내용의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이관 및 위원장 교체 지명 건의라는 문서에 서명했다. 보고자는 정홍식 비서관이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대통령 소속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을 6월 1일부터 정보화에 대비한 전담행정기관을 설치할 때까지 체신부로 이관키로 관계부처가 합의했습니다. 이에 위원장을 현재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최영철 체신부 장관으로 교체 지명해 주실 것을 건의합니다. 아울러 사무국 인원도 체신부로 파견해 위원회 간사 기능과 정보화 관련 연구 기획 기능을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국가정보화 중심이 과학기술처에서 체신부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정부가 정보화 전담 행정기관을 만든다면 그 주체는 체신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체신부로 위원회 이관을 성사시킨 정홍식 비서관은 그해 6월 5일 체신부로 전보발령이 났다.
행정 조직의 지각변동은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을 의미했다. 체신부는 김영삼 정부 들어 미래부서인 정보통신부로 화려하게 출범했다. 그 결실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 구현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