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13〉세계 18번째...남극세종과학기지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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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세종과학기지 준공식이 박긍식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해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극지연구소 제공

1987년 10월 6일. 아침 동해 바다는 얌전했다.

울산 현대미포조에서 남극과학기지 건설자재와 장비를 실은 현대중공업 소속 HH1-1200호 건설선(선장 조현구)이 이날 오전 10시 출항했다. 2만5000톤급 건설선에는 선장 등 24명이 승선했다. 목적지는 칠레 킹조지 섬. 거리는 1만7240㎞. 멀고 험한 바닷길이었다.

이날 출항식에는 허형택 해양연구소장과 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현대중공업 관계자 50여명, 한국해양소년단원 100여명이 참석해 이들의 장도를 축하했다. 해양청소년단원은 조현구 선장 등 선원들에게 꽃다발을 주고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건설선에는 과학기지공사에 사용할 건설자재, 현지에서 사용할 기중기와 불도저, 임시 부두로 쓸 바지선 2척과 예인선·페리선 등을 실었다.

“뿌우웅!” 미포항을 출발한 건설선은 힘찬 고동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동해로 나가 태평양을 횡단, 중간 급유지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칠레 발파라이소 항으로 향했다.

11월 27일 남극과학기지건설단 174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남극으로 출국했다. 건설단장은 남극과학기지 조사단장이던 송원오 해양연구소 제1연구부장이었다. 현대건설 현장소장은 조중환 씨, 감리단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소속 김동욱 씨였다.

송원오 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장의 회고. “남극수송계획은 각종 건설장비와 자재를 건설선 편으로 먼저 보낸 다음 건설단원은 나중에 칠레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울산 미포항을 출항한 건설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에서 해외 발주 연구장비, 과학기자재, 보급품 등을 선적한 후 칠레 발파라이소 항에 입항했다. 이에 맞춰 건설단 174명은 서울을 출발, 항공편으로 산티아고까지 갔다. 마지막 발파라이소 항까지는 전세 버스편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건설선에 승선했다.”(남극에 서다).

킹조지 섬으로 가는 길은 예상처럼 험난했다. 남위 40도와 50도의 폭풍우대에서는 심한 풍랑으로 많은 이가 극심한 배멀미에 시달렸다. 밤에는 사정없이 뱃전을 두드리는 성난 파도소리에 잠을 설쳐야만 했다. 특히 남빙양 유빙을 피하느라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2월 15일 건설선은 목적지인 킹조지 섬에 도착했다. 울산항을 떠난 지 70일 만이었다.

건설선은 과학기지건설 예정지에서 5㎞ 떨어진 바다에 정박했다. 건설단은 건설장비와 기지재 등 화물을 해체하고 임시 부두 가설작업을 벌여 이튿날인 16일 기지에 상륙했다.

당시 현대건설에서 파견나간 B씨의 증언. “아침에 눈을 뜨니 선창 밖에 떠돌아다니는 유빙들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드디어 남극이구나 하는 긴장감이 들었다. 만조 때를 기다려 킹조지 섬에 올라가니 각종 새들이 거세게 저항했다. 일제히 새들이 날아오르고 물가 동물들도 소리를 지르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들만 생활하던 조용한 곳에 낯선 인간들이 침입했다는 위기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동물의 보금자리를 침범하고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다.”

12월 16일 남극과학기지건설단은 현지에서 기공식을 거행했다. 건설단원들은 빈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이어 세계 18번째 상설기지 건설을 위한 첫 삽질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건설단원이 머무를 숙소를 지었다. 숙소를 짓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바지선을 타고 건설선까지 바닷길을 오갔다. 건설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남극은 오전 2시쯤이면 신문을 읽을 정도로 날이 환했다. 건설단원들은 늘 대기상태로 있다가 날씨가 좋으면 즉시 뛰어나가 작업을 했다. 강풍이 불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면 그 즉시 무조건 현장에서 철수했다. 자칫 인명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극 날씨는 변덕이 심했고, 파도는 거칠었다.

남극과학기지 건축 전체 면적은 1400㎡(약 432평) 정도였다. 다른 외국 기지들과 비교하면 중간 규모였다. 과학기지 건물은 본관동, 주거동, 연구동, 하계 거주동, 기계동, 장비동, 관측동, 통신동 등 8개 동이었다. 통신동에는 근처 외국 기지나 배들과 통신할 수 있는 무전시설을 구비했다. 그곳에서 전화는 국제해사기구 인공위성을 이용해 한국과 통화했다. 1999년 인터넷을 설치하면서 전화 요금 부담이 크게 줄었다.

본관동에는 식당과 휴게실, 연구동에는 대기과학·해양과학·생명공학 연구실을 각각 설치했다. 이들 건물은 모두 지상에서 1.5m 이상 띄운, 공중에 설치하는 원두막 형식의 고상식(高床式)으로 지었다. 고상식 건축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겨울철 적설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이었다. 건물은 모두 조립식이다. 한국에서 설계도에 맞게 조립해 온 건축물을 현지에서 조립만 했다.

공사 과정에서 있은 일화 둘. 당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식사 때마다 작업자들에게 소주 한 컵씩을 제공했다. 주량이 센 사람은 주량이 약한 사람 소주까지 마셨다고 한다. 언 몸을 녹이는 데 소주가 한몫했다.

다른 하나는 폐쇄공간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단원들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폭발하고, 심지어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심하던 건설단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빈 컨테이너 박스에 노래방을 만들었다. 노래방 기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1970년대식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을 꾸몄다. 이게 신의 한 수였다. 노래방은 직원 간 화합과 단합 장소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직원들은 이곳을 '남극 살롱'이라고 불렀다. 작업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젓가락 박자에 맞춰 향수를 달래는 '고향 노래'가 남극 하늘로 울려 퍼졌다.

12월 3일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해양연구소는 남극과학기지 준공을 앞두고 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에 우리나라 기지를 세우는 역사적인 뜻을 기리기 위해 기지 명칭 공모에 나섰다. 당선작 1편에는 50만원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1988년 1월 15일 과학기술처는 남극과학기지 명칭을 '세종'으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공모에는 전국에서 모두 910건이 응모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한 세종대왕의 숭고한 뜻을 기리자는 의미에서 '세종'을 과학기지 명칭으로 결정했다. 과학기술처는 이 명칭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회고. “남극과학기지 명칭은 공모를 거쳐 '세종'이라고 했다. 조선조 임금 가운데 과학에 대해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이 세종대왕이었다. 또 우리 기지가 들어선 지명이 '킹조지' 섬이어서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전두환 회고록2)

2월 9일 박긍식 과학기술처 장관은 남극세종과학기지 준공식과 현판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박 장관 일행은 2월 16일 오후 남극과학기지에 도착했다.

박 장관은 이어 오후 9시 30분 전두환 대통령과 7분 동안 통화를 했다. 전 대통령은 “남극과학기지 건설을 축하한다”면서 관계자들의 노고를 높이 치하했다.

박승덕 당시 과학기술처 실장의 말. “준공식 참석자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유사 이래 최초인 남극과학기지를 방문한다는 기대감으로 각 부처와 기관, 언론사 등에서 희망자가 너무 많아 국내 인사 20명과 현지 인사 184명 등 모두 204명으로 참석자를 확정했다.”

체신부는 2월 16일 남극과학기지 준공 기념으로 기념우표 300만장을 발행했다. 당시 우표 1장 가격은 80원이었다.

2월 17일 오전 10시 킹조지섬 현지에서 남극과학기지 준공식과 현판식을 거행했다. 세계 18번째 남극 상주 과학기지 건설이었다. 준공식에는 박긍식 과학기술처 장관을 비롯해 이용훈 주칠레대사, 박승덕 과학기술처 연구조정실장, 장성태 기술협력국장, 허형택 해양연구소장, 김지동 동력자원연구소장 등과 칠레·소련·중국 등 7개국의 남극과학기지장 및 현대건설단원 등이 참석했다.

준공식은 송원오 건설단장 경과보고에 이어 허 소장 개식사, 박 장관 치사, 축사, 현판식 순으로 진행했다. 박긍식 장관은 치사에서 “우리나라 미래 자원보고인 남극에 우리기술과 장비로 과학기지를 건설한 것은 과학기술 입국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온 정부의 정책 의지와 불굴의 도전 정신이 이룩한 결과”라면서 “남극과학기지 건설은 국력 신장의 상징이며 한국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고 말했다.

허형택 해양연구소장은 “한국은 세계 18번째 상주기지를 둔 나라로 발전했고, 제7 대륙으로 불리는 남극대륙에서 과학자들이 1년 내내 연구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남극세종과학기지 건설은 한국이 남극과학시대를 열고 극지연구 강국으로 가는 거대한 디딤돌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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