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장비사들이 주문량 급증으로 역대 최대 수주잔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곳간은 넉넉치 못해 자금 마련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장비 생산부터 납기까지 기간(리드타임)이 길어 매출 인식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유상증자로 자금을 조달, 운영비 확보에 나서고 있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원익피앤이, 씨아이에스(CIS), 디이엔티 등은 최근 유상증자 추진을 알렸다. 이들은 각각 343억원, 300억원, 1187억원을 조달할 예정이다. 원익피앤이는 이차전지 활성화 공정, 씨아이에스는 전극 공정, 디이엔티는 레이저 노칭 장비가 각각 주력인 배터리 장비사다.
3사의 장비 수주량은 배터리 시장 성장세에 힘입어 급증하는 추세다. 상반기 기준 원익피앤이와 씨아이에스의 수주잔고는 각각 6580억원과 780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33.2%, 61.1% 늘었다. 디이엔티 수주잔고도 같은 기간 474억원에서 552억원으로 16.5% 증가했다.
이같은 수주 물량 증가에도 장비사들이 일제히 유상증자에 나선 건 자금 사정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장비 제작 물량이 많아져 자금 소요는 많아졌는데, 통상 18개월 이상인 리드타임을 감안하면 매출 발생은 내년 이후에야 가능하다. 장비사 매출은 설비 발주 이후 제작과 입고, 생산 라인 셋업 과정이 모두 마무리돼야 인식이 이뤄진다.
지난 상반기 기준 원익피앤이 현금 및 현금성 자산 규모는 1519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42% 급감했다. 씨아이에스와 디이엔티는 1015억원과 115억원으로 전년 말보다 각각 2.1%, 55.4% 줄었다.
장비업체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이차전지 분야에서 장비 수주가 늘고 있지만, 수요 대응을 위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자금이 부족한 역설적인 상황”이라며 “매출 발생 이전인 올해 말까지가 보릿고개”라고 말했다.
주주들은 유상증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유상증자는 주식 수 증가로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가 희석된다는 점에서 주가 측면에서는 악재에 해당한다. 신규 자금이 투자에 활용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긍정적 관점도 있지만, 주가 약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원익피앤이와 씨아이에스 주가도 유상증자 공시 이후 약 5% 안팎으로 떨어졌다.
다만 장비사들은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선 유상증자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고금리 국면에서는 차입보다 유상증자가 자금 조달에 유리하다.
또 다른 장비업체 관계자는 “자금난으로 유동성 수혈이 이뤄지지 않으면 설비 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수주 증가에도 정작 자금은 부족한 '풍요 속 빈곤'”이라며 “유상증자에 대한 주주 우려를 잘 알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다방면으로 자금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호길 기자 eagle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