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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6월 16일 제10회 정보문화의 달 기념식에서 전길남 박사 등 유공자에게 훈·포장을 수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성공이냐 실패냐.” 1982년 5월 어느 날. 경북 구미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컴퓨터연구실은 기대와 긴장감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전길남 박사와 연구원들은 잔득 긴장한 채 컴퓨터 화면만 주시했다. 성공이냐 실패냐. 그 순간 컴퓨터 화면에 영문글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SUN. 서울대에서 보내기로 한 서울대 영문 약자였다. “와 성공이다!” 순간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길남 박사와 연구원들은 감격에 겨워 서로를 격려했다.

이날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사이에 한국 최초로 인터넷 프로토콜 패깃 통신(TCP/IP) 방식의 네트워킹에 성공했다. 전송 속도는 1.2kbps였다. 초당 150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속도였다. 기종이 다른 컴퓨터를 연결한 일은 한국 최초이자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였다. 이 연결은 공간을 초월한 한국 인터넷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이 시간 구미와 250㎞ 떨어진 서울대에서도 김종상 전산학과 교수와 연구실 대학원생들이 컴퓨터 앞에서 기쁨을 나누었다. 당시 한국은 인터넷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인터넷은 미국이 선두 주자였다. 1969년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 주도로 패킷 교환 방식의 컴퓨터 네트워그 통신기술을 처음 개발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와 스탠퍼드대 교환연구소 간 패킷 교환기술에 처음 성공한 게 오늘날 인터넷 모태인 아르파넷(ARPANET)이다.

전길남 박사의 말. “미국은 당시 전산망에 연결할 수 있는 핵심 장비를 수출금지 품목으로 묶어 놓고선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팔지 않았어요.”(서울 집을 떠나 제주도에서 지내는 전 박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전길남 박사는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교포 2세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1961년 오사카대 공대에 입학,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66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UCLA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통신 전문 기업 라디오에 취업해 네트워크 해킷 교환 소프트웨어(SW) 설계업무를 담당했다. 1970년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UCLA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74년 시스템엔지니어링 전공으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3년 6개월을 근무했다. 이때 우주선과 지상관제센터의 통신방법을 연구했다. 1979년 2월 그는 국내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으로 귀국,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시스템 개발부장으로 첫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담당한 분야는 수출이 가능한 국산 컴퓨터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전 박사는 컴퓨터 국산화 못지않게 인터넷이라는 컴퓨터 통신 네트위크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컴퓨터를 서로 연결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전길남 박사의 회고. “당시 정부 당국자들은 통신규약을 통해 서로 다른 종류의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영향력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가 시대를 앞질러 일을 시작한 탓도 있지요. 허허허.”

귀국 이듬해인 1980년 전 박사는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컴퓨터 개발과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등 2개 연구 과제를 정부에 제안했다. 결과는 컴퓨터 개발 과제만 선정되고 네트워크 과제는 탈락했다. 전 박사는 1981년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과제를 다시 제안키로 결심했다. 이 무렵 과학기술처에서 경상현 박사를 우연히 만났다. 경 박사는 정부 과제 선정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국내 사정에 어두운 전 박사에게 경 박사는 해법을 말했다.

전길남 박사의 회고. “전 박사, 그걸 2개 과제로 제안하면 백날 신청해도 다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로 묶어 제안하는 게 좋습니다. 정부 연구 과제는 제한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과제를 제외하는 방식입니다. 분리한 2개 과제는 하나만 지원하고, 하나는 탈락하니 꼭 해야 하는 과제라면 컴퓨터 개발 과제에 결합시켜 제안하세요.”

전 박사는 경 박사의 말대로 2개 프로젝트를 하나의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로 통합했다. 컴퓨터 개발 필수 과정으로 컴퓨터 간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정의 네트워크’(SDN) 연구개발(R&D)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전 박사는 그해 9월 30일 작성한 ‘SDN예비계획’에서 메모 교환, 프로그램 교환, 컴퓨터 자원 공유, 데이터베이스 접속, 시스템 시험, 컴퓨터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 환경에서의 작업습득 등 7가지를 개발 이유로 제시했다. 경 박사의 조언은 신통력을 발휘했다. 그해 SDN 과제는 무난히 정부 심사를 통과했다.

전 박사는 1982년부터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에 착수했다. 컴퓨터연구실 인력 대부분을 컴퓨터 국산화 과제에 배정하고 1명만 네트워크 개발에 투입했다. 전 박사는 당시 서울대에 출강하고 있었다. 서울대 전산학과 대학원생 대여섯명도 개발 업무에 참여했다. 그해 5월 한국은 세계 두 번째로 SDN을 연결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전길남 박사의 증언. “그런데도 정부 평가는 야박했어요. 1년 단위로 진행하는 이듬해 과제수행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탈락했어요. 평가 담당자는 ‘이런 거 왜 합니까. 그 역량을 컴퓨터 개발에 집중하세요’라고 했어요.”

전 박사는 그해 9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KAIST는 시스템구조연구실을 마련했다. 전 박사의 시스템구조연구실은 매주 금요일 오후 학생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하는 정기 세미나를 열었다. 당시 시스템연구실은 별난 곳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연구에 필요한 자료와 장비 등을 최고로 제공했지만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전 박사는 “승려가 절에서 수도하듯 공부만 하라”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이 금혼령을 준수했다. 전 박사는 대학원들에게 네트워크와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시스템은 유익하고 좋은 것이다. 우리가 잘 만들면 국가산업과 기술 발전은 물론 세계 기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대학과 주요 연구기관들이 하나둘 컴퓨터를 KAIST SDN에 연결하기 시직했다. 1984년에는 10곳, 1985년에는 20여곳으로 늘었다. 이들이 SDN에 연결한 가장 큰 목적은 미국 등 선진국의 앞선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이용자가 늘면서 통신료 부담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KAIST의 경우 매년 SDN 국제통화료가 수천만원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 한 채 가격이 5천만원대였다. 전 박사는 시스템구조연구실의 과제 연구비로 통화료를 충당했다. 그러나 이 방법도 한계가 있었다.

1983년 어느 날 전 박사는 경 박사를 만났다. 전 박사는 그동안의 과정과 KAIST로 옮긴 일 등을 이야기했다. 전 박사가 전한 그날 경 박사와 대화한 내용. “SDN이 너무 성공해서 큰일입니다.” 경 박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너무 잘돼서 큰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각 대학과 연구소 등이 속속 SDN에 가입해서 외국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통에 KAIST 연구실이 국제전화 통신요금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국제전화 통신료 문제를 도와드리죠.” 경 박사는 한국통신 과제를 전 박사의 시스템연구실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전화통신료를 지원했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진행한 ‘전산망 간 연동화 연구’란 과제를 발주해서 매년 3000만~4000만원에 이르는 돈을 시스템연구실로 지원하고, 이 돈을 국제전화 통신요금으로 한국통신에 내는 구조였다. “국제전화 통신료도 당시 한국통신 부사장으로 일하던 경상현 박사의 도움을 받았어요.” 전 박사는 1994년 3월 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마스트플랜 위원장직을 맡아 초고속 인터넷 한국의 청사진을 만들었다. 전 박사는 1997년 6월 16일 제10회 정보문화의달 기념식에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구축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전 박사의 대학 연구실은 한국벤처 산실이었다. 한국 최초 인터넷 회사인 아이네트의 허진호 박사(전 세미트랜 링크 인베스트먼트 대표)와 솔빛미디어 박현제 전 대표, ‘바람의 나라’를 만든 넥슨창업주 김정주 전 회장, ‘리니지’ 게임을 만든 송재경 대표(현 엑스엘 게임즈 대표), 삼보컴퓨터 정철 전 대표 등이 그의 제자다. 지금도 이들과 가끔 만난다고 한다.


전 박사는 한국 인터넷 어버지로 불린다. 전 박사는 이런 공로로 2012년 인터넷 소사이어티(ISOC)에서 제정한 ‘제1회 인터넷 명예의 전당 33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 박사의 열정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