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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팀플레이어 대표

얼마 전 대형병원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코로나19 환자 관리를 위해 입구에서는 QR코드 출입증을 받기 위해 커다란 스크린에 본인 휴대폰 번호를 터치해야만 했다.

내게는 한눈에 쉽게 작동할 수 있는 화면이라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앞 줄이 줄기를 기다렸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은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훨씬 많은 할머니였다. 커다란 스크린 앞에 할머니가 서 있을 때 안내담당자가 "천천히 하세요. 여기 누르시면 되고요. 모르면 제가 도와드릴 테니 천천히 하세요"라고 말했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천천히'라는 단어여서 나의 뇌는 살짝 멈칫했다.

3년이 넘는 코로나19를 겪으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대면으로의 빠른 변화였다.

은행점포를 가는 대신에 모바일과 PC에서 가능한 모든 서비스를 완료할 수 있었고, 음식주문도 모바일앱에서 몇 번의 클릭만으로 집 앞에 배달된다. 이뿐만 아니라 대면의 공간에서 비대면으로 소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식당 문 앞에는 주인대신 대신에 예약 또는 주문용 터치스크린을 먼저 반기고 예술공연관람 때에도 앱을 통해 대기순서를 부여받는다. 병원을 가지 않아도 건강을 진단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이 급성장했다. 마트에서는 셀프계산대가 보편화됐고 주차정산도 사전정산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코로나19 환경은 디지털 세상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 이로 말미암아 디지털을 부담없이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면서 다양한 '디지털 소외계층'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햄버거 가게에서 구매를 못했다는 어머니의 얘기가 많이 회자됐고 흔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햄버거를 먹기 위해 터치스크린을 조작하는 것은 시니어만 힘든 게 아니다. 젊은 MZ세대 역시 쉽지 않다. 메뉴를 고르기 위해 큰 스크린 기기를 좌우, 위아래로 훑어보는 동안 '아, 빨리빨리 선택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봤고, '이 메뉴는 뭐가 들어 있을까? 피클 없이 주문이 가능할까 '라며 망설일 때 뒤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힐끔 곁눈질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직원이 계산해 주는 곳은 사람이 많아 기다려야 하지만 셀프계산대를 이용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바코드스캔을 잘할 수 있을까? 지난번에 종량제 봉투를 선택하다가 계속 점원을 기다리면서 뒷사람 눈치가 보였는데...' '감자는 바코드가 없는데 셀프계산대에서도 될까?'라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긴 줄의 직원계산대를 이용하게 된다.

디지털기기는 내가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나를 바보로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다. MZ세대에게도 부담 없는 존재는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일한 분야의 서비스라 해도 화면 구성과 디자인, 명칭(네이밍)이 다르기 때문에 매 순간 다른 화면 구성을 빠르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 사업마다 서비스마다 조작이 다른 화면은 표준화나 통일화될 수 없다. 관공서 서비스도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개별 사업자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어떻게 일관성 있게 제공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빠르게 인지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프랑스에서는 코로나19로 대면 활동이 줄어든 사람이 느끼는 고독·외로움·소외감을 줄이기 위해 수다 전용 계산대를 만들었다. 빠르게 계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계산원과 구매 물건에 대한 상의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다 전용 계산대다. 단순히 물건을 구매·결제하고 마트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동안 구매할 물건에 대한 의견부터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그래서 데이트를 어디서 했는지 등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다양한 연령의 고객은 그들이 인간적 교류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블라블라 계산대(수다계산대)'를 이용할 수 있다. 일본도 비슷한 계산대를 운영하고 있다. 느린 계산대다. 느린 계산대의 점원은 천천히 말하고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 시니어를 편안하게 쇼핑하도록 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디지털을 원해서 빨리빨리 가고자 하는 니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사회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빠른 프로세스가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용자경험(UX) 디자인을 하는 것은 디지털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빠름을 달성하기 위해 서비스 프로세스를 줄이고 클릭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하는 것을 사용성 향상이라고 본다면 UX는 사람을 지향해서 그들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원하는지, 어떤 곳에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찾는 데 집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용자에게 좋은, 가치 있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를 고려한 고객 여정(Customer Journey)에 대해 더욱 많은 집중을 해야 한다.

김인숙 팀플레이어 대표 ux.teamply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