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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9월 22일 과학기술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설마 시행할까?”

전두환 정부 출범 후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가슴 졸인 곳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었다.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위원회가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최소 규모로 통합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과학원(KAIS)을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현 KAIST)으로 새롭게 출범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런 방침에 통폐합 대상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좌불안석이었다. 당혹감 속에 일부는 “통폐합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과 동떨어진 극히 일부의 희망 사항이었다.

과학기술처 고위인사 A씨의 회고. “과학기술 입국을 구현하기 위해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이 줄을 이었다. 연구기관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연구기관 운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서 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하도록 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과학자들이 어려운 연구 대신 편한 관리나 행정직 업무를 선호했다. 일부 연구기관장은 해외 출장을 자주 나가 장기간 해외에 머무르는 일도 빈번했다. 이른바 귀족 과학자가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해외 과학자 유치용 자리까지 마련하는 연구기관도 등장했다. 이런 행태는 과학기술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풍토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1980년 8월 당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모두 19개였다. 과학기술처 소관 연구기관이 7개로 가장 많았다. 상공부 4개, 동력자원부 3개, 국방부 1개, 체신부 1개, 공업진흥청 1개, 전매청 2개였다. 국보위 경과분과위는 기존 연구기관 보고서 등을 토대로 실태 점검에 나섰다. 그리고 점검 결과를 토대로 연구체제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보고서를 아래와 같이 작성했다.

첫째 전체 연구인력과 시설·투자에 비해 단위 연구기관이 많아 자원 투자 효율이 떨어지고 단위 기관 관리직이 많아 능률이 떨어지며, 연구직의 관리직화 폐단이 심각하다. 둘째 연구소 기능과 분야가 유사해 중복기술 연구와 연구 수탁 또는 예산 배정을 놓고 과열 경쟁이 발생하며, 소관 부처와 연구기관 간 협조 부족으로 연구인력 및 기술정보 교류가 부진하고, 공동 시설 이용이 어려워 국가 전체 연구 효율을 저하시켜 연구 결과 활용이 부진하다. 셋째 국가 차원에서 전체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종합조정관리(과제 선정과 투자 배분, 연구 성과 평가와 활동 등) 미비로 연구 투자 성과가 저조하다.

국보위 경과분과위는 그해 8월 전체 회의를 열어 연구기관 정비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보위는 회의에서 과학기술 인력 양성과 기업 과학기술 개발 지원 등에 대한 정책 방안도 마련했다. 국보위 경과분과위원이던 조경목 전 과학기술 차관의 회고. “당시 내부 논의를 거쳐 중복 투자를 막고 연구 성과를 높이기 위해 19개 연구기관을 최소 규모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국보위는 그해 10월 발간한 '국보위 백서'에서 주요 과학기술 정책 방향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연구기관 운영 합리화=국가연구개발체계를 정비, 강화한다. 그동안 정부가 설립한 출연기관이 19개에 이르고 이들 기관과 소관 부처가 달라 유사 기능과 연구 중복, 관리직 비대로 인한 간접 경비 증가, 국가 목표에 부합하는 과제 선정과 계획적인 추진 등이 어렵다. 한정된 투자 재원으로 연구 효율을 극대화하도록 이공계 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하고 소관 부처를 일원화한다. 동시에 연구 중심 운영체제를 확립한다. △기술인력 양성=산업 고도화에 따라 급증하는 과학기술 인력 수요에 대응하고 기술 혁신 주역인 고급 과학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과학원(현 KAIST)을 확충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통합 운영, 연구와 인력 양성 병행 체제를 확립한다. 국비 해외 연수 사업을 진행하며, 1981년에는 100명을 주요 선진국에 파견 연수하고 해외에 있는 과학기술자를 적극 유치한다. △기업 기술개발 지원 확대=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성장 잠재력을 배양하기 위해 기업의 기술개발 투자 확대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 한국기술개발투자주식회사(가칭)를 1980년에 설립, 운영토록 한다. △산업 전문기술 육성=선진국과의 기술 격차 문제를 해소하고 선진공업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선진 과학기술의 과감한 도입과 소화·개량·자립 개발이 필요하다. 기업의 기술 도입 촉진을 위해 전 산업 분야 기술 도입에 대해 자동 허가제를 실시하고 인가제를 신고제로 자율화하는 방안을 검토, 1981년부터 시행한다. 또 국내 기술용역을 육성하기 위해 공장건설 용역업체를 분야별로 소수 정예화한다. 난립한 전문기술용역업체를 정비하고 국내 공장 건설은 국내 용역업체를 주계약자로 해서 경험과 전문지식을 축적한다. △국가 기술자격제도 개선=우수한 산업기술과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국가 기술자격제가 학력 위주인 점을 감안, 기능사 2급 자격 제한을 철폐하고 기사 2급 자격 기준을 현장 위주로 확대한다. 대학과 전문대학의 의무검정제도는 폐지한다.

그해 9월 17일. 새 정부 출범 후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경제기획원을 시작으로 국정 전반에 대한 부처별 업무 파악에 들어갔다. 전 대통령은 각 부처를 순시하지 않고 각 부처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부처 소관 업무보고를 받기로 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던 이웅희 전 문화공보부 장관의 설명. “전 대통령은 중앙부처에 대한 순시를 생략하고 대신 청와대에서 부처별 업무보고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는 새 정부 출범으로 각 부처의 업무량이 많아 대통령이 순시에 나설 경우 부처에 업무 부담을 주는 일을 피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해 9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으로부터 과학기술 정책을 보고받았다. 전 대통령은 업무보고를 받고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잘 검토해서 통폐합할 곳은 통폐합하라”고 지시했다. 전 대통령은 “연구진 활동은 실적 위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해외 연수를 과감하게 보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양면에서 이론과 고급기술 획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대통령은 “수입자율화 품목에 대한 저항감만 갖지 말고 국산품의 질 향상 노력을 해야 하며, 수입자율화 품목을 적절히 조정해서 국산품의 질 향상을 높이도록 하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처 업무보고에는 남덕우 국무총리서리, 신병현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장덕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전 농수산부 장관) 등이 배석했다. 장덕진 의원은 국내 첫 고시 3관왕(입법·행정·외무)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처의 대통령 업무보고를 주목하고 있던 연구기관들은 '혹시나' 하며 이변을 기대했다. 하지만 연구기관 통폐합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대책반을 구성해 실행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그동안 부처별로 운영하던 연구기관을 통폐합하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당시 과학기술처 기술개발과장으로서 통폐합 실무작업을 한 한기익 전 과학기술처 정책기획관의 회고. “이 작업은 엄청 어려웠습니다. 해당 연구기관의 반발도 거셌어요. 하지만 국보위를 거쳐 장관, 대통령이 이런 방침을 거듭 밝혔으니 이 일은 회군(回軍)이 불가능했습니다. 작업은 과학기술처와 서울 시내 외곽 호텔에서 합숙하며 했습니다. 연구소별로 자기들이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학연과 지연을 통한 로비도 엄청났어요. 당시 이 일을 담당하던 과학기술처 간부들을 폄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이 일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런 의견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취임 후 처음으로 1981년도 예산안 제출에 즈음한 국회 시정연설을 했다.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폐합과 이를 통해 연구소 운영의 합리화를 추진하겠으며, 기업 기술개발 지원을 강화해 기업 주도의 기술혁신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정부는 산업 고도화에 따라 고급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이공계 대학원과 한국과학원을 확충하며, 해외 기술 연수를 확대하고 해외 과학두뇌를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전 대통령은 “중소기업의 노후시설 교체를 위한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기술과 경영지도를 강화하며,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이나 과잉투자를 조정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수출 주도 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폐합은 과학기술처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