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밥그릇과 규제 혁신

오일쇼크로 경제위기를 겪던 1970년대에 '밥그릇 규제'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쌀 생산량이 부족했고, 정부는 양곡 소비 절감을 위해 식당 밥그릇 규격을 규제했다. 식당에서는 지름 10.5㎝, 높이 6㎝의 스테인리스 밥공기만 사용해야 했다. 밥은 밥공기에 5분의 4만 담도록 규제했다. 이를 위반하면 영업정지나 영업허가 취소를 받았다. 이후 벼 품종 개발과 쌀 생산량 증대로 규제는 사라졌지만 규제의 흔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 남아 어느 식당을 가든 비슷한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볼 수 있다. 규제는 한번 생기면 없애기 어렵고, 규제를 없애도 우리 삶에 익숙한 모습으로 남아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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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

최근 우리 경제가 어렵다. 글로벌 통화 긴축에 따른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 압박으로 산업 활동과 체감경기가 악화하면서 기업 활동도 위축되는 등 우려가 큰 상황이다.

경제가 침체할수록 과감한 규제 혁신을 통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하는 한편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규제환경은 열악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상품시장규제지수(PMR)는 1.71로 38개국 가운데 6번째로 규제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도 한국의 규제환경은 63개국 가운데 48위로, 후진국 수준으로 평가됐다.

규제 혁신은 역대 정부마다 핵심 정책으로 추진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기업이 속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체감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쉬운 과제, 건수 위주의 접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불편하지만 중요한 핵심 이슈에 대해서는 정작 다루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혁신전략회의, 경제규제혁신TF, 민관합동 규제혁신추진단, 규제심판부 등 다양한 규제 혁신 추진체계를 신설하고 민·관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새 정부가 성공적인 규제 혁신을 하려면 좀 더 과감한 추진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규제 개선 방침을 확정한 과제를 발표하고 있지만 이해관계자 갈등에 막힌 핵심 규제 혁신 과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대면 의료, 공유경제 플랫폼 등 이해관계자 갈등이 큰 이슈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정·중재 능력을 발휘, 규제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대표적인 갈등 규제인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 완화가 국민 제안으로 규제심판회의에 상정됐지만 소상공인의 반발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규제 혁신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추진동력을 잃지 않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 공전으로 규제 혁신 동력이 상실되지 않도록 적극행정 및 하위 법령 개정 등을 추진하고 중복적으로 적용되는 규제, 시대 상황에 맞지 않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규제는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또한 정부의 규제 혁신 의지가 최일선에 있는 공무원들에게도 잘 전달되도록 하고, 규제비용관리제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규제비용 절감에 따른 획기적 인센티브 도입도 필요하다.

규제 개선과 더불어 새로운 규제가 양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국회 발의 법안은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고, 전체 입법에서 차지하는 의원입법 비중이 95%가 넘지만 의원입법에는 규제에 따른 비용편익을 분석하는 제도가 없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주요 선진국들은 의원입법에 대한 영향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의원입법에 대한 입법영향평가제도를 도입, 과잉 입법을 방지하고 입법 품질을 제고해야 한다.

지난 60년 동안 한국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1970년대 오일쇼크,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여러 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경제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밥그릇 싸움으로 해결하지 못한 핵심 규제들을 과감하게 혁신하고 규제관리시스템을 선진화함으로써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한편 경제 활력을 높여 최근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가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 stonek@korcha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