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68>과학기술 메카 '대덕연구학원도시'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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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1월 24일 과학기술처를 연두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 계획대로 도시 건설을 추진하시오.” 1973년 12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을 재가하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기본계획은 한국 과학기술 요람의 설계도였다. 설계도가 사업으로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사업 확정을 위해 과학기술처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자세로 1년 동안 총력전을 펼쳤다.

과학기술처는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 이어 같은 해 5월 18일 연구학원도시 건설계획 시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열흘 후인 5월 28일 박 대통령이 사업을 재가하면서 국가계획사업으로 추진토록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12월 말까지 과학기술처가 관련 부처의 협조를 받아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 지시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김형만 박사에게 의뢰한 연구학원도시 타당성 조사와 계획 기준 설정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그해 12월 초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을 완성했다. 과학기술처는 이 계획을 12월 21일 연구학원도시 건설추진위원회 심의와 국무총리 결재를 거쳐 당일 최종 박 대통령 재가를 받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도시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에 대덕연구학원도시 기획단을 구성토록 지시했다. 기획단장직은 청와대 정소영 경제1 수석비서관이 맡았다. 이 조치는 학원도시 건설은 한국과학기술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로, 청와대가 부처 업무 조정과 협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획단이 도시 건설 사업의 최종 컨트롤타워 기능을 한 것이다.

단원은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 경제기획원 예산국장, 문교부 교육시설국장, 건설부 주택도시국장, 충남도지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 등이었다. 간사는 청와대 담당비서관과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이 담당했다. 당시 기획단은 △도시계획 수립과 조정 △투자 계획 수립과 조정 △관계부처 간 업무 조정 △입주 기관 이전계획 검토 △기타 도시 건설 관련 사항 등 모든 분야를 다뤘다.

기획단은 도시 건설을 위해 정부 부처가 추진해야 할 업무도 명확히 분담했다. 기획단의 업무 분담 조치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주관하면서 입주 기관과 교육기관 건설계획과 입주 시기 등을 총괄했다. 경제기획원은 도시 건설에 필요한 자금 확보계획을 수립해 1974년부터 예산에 반영하고 전자·전기, 해양 등 5대 연구기관 설립 자금과 기타 입주 기관 이전 예산을 연차적으로 예산에 반영토록 했다.

내무부(충남도)는 도시 건설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필지·토지 소유자 보상과 주민 이주 등 토지 매수 및 구획 정리에 따른 사전 행정 조치를 하도록 했다. 문교부는 학원연구도시에 입주 또는 신설 교육기관(초·중·대학) 설립 계획을 수립키로 하고, 상공부는 연구학원도시에 필요한 전력을 차질 없이 공급키로 했다. 건설부는 도시건설 예정지에 대한 기준 지가 고시, 도시계획 구역 고시, 도시계획 수립 등 필요한 제반 행정 조치를 하고 도시와 연결하는 도로와 교량 건설을 비롯해 진입로·용수시설·하천보수 등 각종 공사를 담당키로 했다.

건설부는 그해 12월 3일 장예준 장관이 충남 대덕군 탄동면 매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41.76㎦를 기준 지가 지역으로 고시했다.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선행 조치였다. 건설부가 고시한 지정 지가 지역은 대덕군 회덕면·유성면·구축면·탄동면 일대였다. 건설부는 지정 지가 고시에 앞서 토지 평가사들의 현지 실태조사와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확인을 거쳤다. 이 지정 지가는 토지 매수시 기준 가격이며, 토지 수용 시 보상액 산정 기준이라고 건설부는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도시 건설 기본계획을 최종 재가함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도시 건설에 필요한 예산 책정을 경제기획원에 요청했고, 각 부처도 역할 분담에 따른 업무를 진행했다. 이런 조치로 대덕연구학원도시는 이듬해인 1974년부터 본격적인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전상근 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증언. “대덕연구학원도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결과입니다.”

박 대통령이 기본계획을 재가하자 과학기술처는 한글과 영문으로 기본계획 책자를 발간했다. 영문은 미국 과학계에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봉재 전 한국과학재단 사무총장(당시 과학기술처 총무과장)의 회고. “대통령이 재가한 기본계획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당시 미국 출장 중인 김형기 과학기술처 연구조정관에게 미국 조야에 이 사실을 널리 홍보하라는 최형섭 장관의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밤새 원고를 정리하고 인쇄한 뒤 서둘러 제본했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책자를 그날 새벽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탑승객을 수소문해서 전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기본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시건설 기본 방향=연구소와 학원이 공존하는 지적 공동체를 형성해 과학기술의 효율적인 지적 교류로 과학기술 개발을 촉진한다. 도시 특성은 두뇌도시이자 과학공원도시, 연구와 학문을 생활하는 도시를 건설한다. 이를 위해 연구소와 학원 중심 도시를 형성하며, 자연 보전을 통한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연구와 생활이 동일한 권역을 만든다. 또 농지와 생활녹지를 최대한 보전하고, 대전과 상호 보완적인 도시 개발을 추진한다.

◇건설 기간=1974~1981년 8년으로 한다. 전체 면적은 26.8㎦이며, 상주 인구는 5만명으로 한다.

◇계열별 연구기관 설립 계획=전자·전기·기계 등 5개 전략산업 분야 연구소 등 모두 7개 분야를 1974~1981년에 설립한다.

△조선해양계=선박연구소와 해양개발연구소 △기계계=국립공업표준시험소, 국립농업자재검사소, 종합기계기술연구소 △전자전기계=전자통신연구소, 전기통신연구소 △석유화학계=석유화학연구소 △건설계=철도건설연구소, 국립지질광물연구소 △식품보건계=국립보건원, 국세청기술연구소, 식품연구소 △농수산계=국립농산물검사소, 국립농산물검사소시험소, 중앙수산물검사소, 중앙전매기술연구소 △공동이용계=전자계산실, 공작실 외 5개 분야.

◇교육 시설 신설=대학교 1개와 중·고교 4개, 초등학교 3개 ◇주택 시설 규모=주택은 1세대 1주거를 원칙으로 연구기관 2578가구, 교육기관 1018가구, 지원시설 1680가구 등 모두 5276가구를 짓는다. 연구소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위치에 주거단지를 조성한다. 이 가운데 아파트 2638가구, 독립주택 1825가구, 단독 주택 813가구로 짓는다. 녹지대, 인공호수, 가로수도 조성한다.

◇용수·전력·통신 공급=용수는 대전용수처리시설을 확장해서 공급하며, 배수와 오수는 합류식으로 처리한다. 전력은 대전 변전소 시설을 확장 공급한다. 통신은 국내외와 신속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외부 550회선과 시내 1만회선을 설치한다.

◇도시하부 구조시설 투자=건설부가 간선도로를 개설하고 교량과 상·하수도 시설을 설치한다.

◇주민 대책=도시계획 지역 내 현지 주민들을 위한 대책으로 △현지 주민의 재산 손실을 최대한 방지하고 적정 보상을 하며, 생활 근거를 최대한 보호한다. △주민의 취업을 위해 도시 건설 사업에 참여시키고, 연구소 지원 요원으로 우선 채용한다. △상하수도 시설 이용과 전기시설 공급 등을 통해 생활 편익 혜택을 부여한다. △묘지 이전을 위해 공원묘지를 조성한다.

◇도시 건설 추진 체계=관계부처 간 업무 종합조정은 국무총리실이 담당한다. 도시건설 계획수립과 주관은 과학기술처가 맡는다. 도시하부구조 건설사업은 건설부가 담당한다. 계열별 연구소 설립은 소관 부처가 맡아 진행한다. 공공 행정업무는 내무부가 주관한다.

1974년 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과학기술처를 연두순시하고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최 장관은 “올해부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시작하고, 전 국민 과학기술화를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전 국민 과학화를 위해 새마을기술봉사단을 농어촌에 보내 기술봉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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