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정부는 철강과 조선, 기계,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중앙청 회의실에서 2시간 15분간 연두 기자회견을 열고 새해 국정 방침을 소상하게 밝혔다.
회견장에는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 장관과 공화당 간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전국에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진흥 없이 절대로 우리가 선진 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면서 “정부는 1980년대 수출 100억달러 달성을 위해 중화학공업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 “과학기술 발전 없이 국가발전이나 국력 증강은 있을 수 없다”면서 “최신기술 보급으로 중화학공업의 기술 수요를 충족시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 나흘 후인 17일 오전 과학기술처를 순시하고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 진흥으로 산업의 조속한 고도화를 이룩하고 과학기술이 중화학공업 발전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과학기술처는 박 대통령 지시에 따라 중화학공업 기술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처는 국내 수출을 주도하던 철강과 기계, 조선, 화학, 전자 등 특정 분야의 기술 발전을 주도할 특정연구기관 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연구개발 기반 구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이다. 이 법의 특징은 설립하는 연구기관 형태를 재단법인으로 하고 재정 지원은 정부 출연금으로 하지만 기관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데 있다. 연구관리의 기본 철학은 연구기관 자율성 보장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기술 행정의 근간은 통제가 아니라 지원이다. 나는 과학기술 행정은 조정과 지원이 원칙이라고 늘 주장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최 장관의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안을 마련했다.
과학기술처는 법안 마련 과정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육성법을 참고했다.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진흥과 중화학공업 기술지원을 담당할 산업별 전문기관을 설립하고 운영과 관련해 필요한 경우 정부가 인건비나 시설비 등에 출연금을 연구기관에 지급할 수 있으며, 국유재산도 무상으로 양여 또는 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입안했다.
과학기술처는 전략산업으로 육성할 특정연구기관으로 전자통신, 선박, 해양, 종합기계, 석유화학 등 5개 분야를 제안했다.
과학기술처는 이런 내용의 법안을 마련해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부처 간 법안 협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으로서 실무를 총괄한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회고.
“부처 간 협의에서 가장 크게 대립한 부처가 법제처와 경제기획원이었습니다. 법제처는 '연구기관이 많고 개별 연구소별로 성격이 다른데 왜 5대 특정연구소만 단일 법안이냐'며 이견을 제시했어요. 우리는 '연구소마다 개별 법안을 만들면 번잡하고 법의 중복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단일 법안을 만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경제기획원은 '이 법안을 제정하면 예산 지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연구기관에 정부가 출연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등의 이유로 두 부처와 협의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이 법안은 1973년 10월 25일 열린 경제장관회의를 통과했다. 특정연구기관에 출연금을 지급하며, 토지와 시설 등에 국유재산을 무상 양여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과학기술처는 11월 21일 이 법안을 국회로 넘겼다. 해당 상임위원회인 경제과학위원회는 12월 7일 회의를 열고 이 법안을 심의했다. 상임위에는 이창석 과학기술처 차관이 참석했다. 당시 최형섭 장관은 콜롬보 각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 출장 중이었다.
이 차관은 제안설명을 통해 “정부는 중화학공업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자통신, 조선, 해양개발, 종합기계, 석유화학 등을 전략산업으로 정해서 특정연구기관을 설립한다는 방침”이라면서 “이들 연구소는 충남 대덕에 건설할 연구학원도시에 입주시켜 중화학공업 기술을 지원하는 동시에 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최신 기술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차관은 “이를 위해 개별 연구소 육성법을 제정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단일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을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과학위원회는 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심의하고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위원회가 법체계상 불합리하다고 수정한 내용은 △정부가 출연금을 지급하거나 국유재산을 무상으로 양여하거나 대여할 수 있는 대상 기관은 특정연구기관과 공동관리기구로 한다 △특정연구기관은 매년 사업계획서와 예산안을 주무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특정연구기관은 주무장관이 지정한 공인회계사의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 △특정기관은 기밀 엄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등이었다.
상임위를 거친 법안은 12월 18일 오전 10시 본회의에 상정됐다.
◇정일권 국회의장=의사 일정에 따라 특정연기관육성 법안을 상정합니다. 김종철 경제과학위원장 나오셔서 심사보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종철 위원장=이 법안은 경제과학위원회에서 정부 측 제안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 보고를 들은 바 있습니다. 유인물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골자를 말씀드리면 적용 대상은 연구학원도시 안에 있는 특정연구기관으로, 대통령령에 의해 지정하는 재단법인만 해당합니다. 정부가 특정연구기관에 건설비·운영비와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출연할 수 있도록 하고, 특정연구기관에 대한 회계감사는 정부가 지명하는 공인회계사가 하도록 했습니다. 또 특정연구기관 상호 간 관련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특정연구기관이 합동으로 공동관리기구를 설치·운영토록 하고, 이 기구에 대해서도 정부가 출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제과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수정·가결했고,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도 거쳤습니다. 의원님들께서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일권 국회의장=이의 있습니까? 없으면 가결을 선포합니다.
국회는 이 법을 12월 21일 정부로 보냈고, 정부는 12월 31일 법률 2671호로 공포했다.
전문 10조로 된 이 법은 과학기술과 산업경제 발전을 위해 정부가 출연하는 연구기관 설립과 운영을 지원하는 법적 근거가 됐고,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최형섭 장관의 회고록 술회.
“이 법 제정으로 많은 전문연구기관이 등장해 우리나라 과학기술 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앞으로는 정부출연연구기관만을 대상으로 육성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업부설 연구소, 대학부설 연구소, 순수 민간연구소도 지원하고 육성토록 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많은 민간연구소가 생겨서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정부는 1974년 6월 13일 법 시행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 특정기관육성법 시행령을 제정했다. 정부는 시행령에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한국기계기술연구소, 한국해양개발연구소, 한국석유연구소, 한국선박연구소 등을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했다.
정부는 또 시행령에 공동관리 기구 명칭을 '대덕연구학원 도시관리본부(현 대덕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로 정하고 공동이용 시설 설치와 관리, 운영 등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이 법 제정은 정부출연연구기관 설립을 가속하는 계기가 됐다. 법 제정 당시 정부가 지정한 특정연구기관은 5개였다. 이후 1985년에는 연구기관이 10개로 늘었고, 1997년에는 16개로 증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한국해양연구소, 한국전기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과학재단,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인삼연초연구소, 광주과학기술원, 한국항공우주연구소 등이었다.
현재 정부가 지정한 연구기관은 한국과학기술원, 광주과학기술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의학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한국연구재단,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과학창의재단, 한국산업기술진흥원,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한국세라믹기술원,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정보통신산업진흥원, 기초과학연구원 등 16개다.
주무 부처별 연구기관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10개로 가장 많고 산업통상자원부 4개, 원자력안전위원회 2개 등이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