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기후위기와 '달팽이 뿔에서 내려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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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바라기'(1970)의 주인공 조반나 역의 소피아 로렌은 우크라이나의 대초원을 달리는 열차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드넓은 해바라기밭을 바라보며 독일-소련 전쟁(1941~1945) 당시 실종된 남편의 추억에 잠긴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용유 원료 가격이 치솟고 있다. 세계에 공급되는 해바라기유의 60%를 생산하는 양국의 전쟁으로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팜유 가격도 동반 폭등했다. 팜유 최대 생산국인 인도네시아는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는 치밀하게 연결돼 있다.

20세기까지 문제 대부분은 일국 차원 또는 몇몇 국가 사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전쟁도 본질적으로는 지역적·국지적 현상이었다. 핵무기 등장으로 인류 공멸 위기의식이 생겨났지만 핵은 실전용이라기보다 위협용 성격이 강하다. 핵이 실제 사용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만으로는 인류의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후 위기는 다르다. 기후 위기 앞에는 국경선도 없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구별도 무의미하다. 인종, 피부 색깔, 국적, 이념, 계층, 성별, 정치 성향도 의미를 상실한다. 기후 위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핵을 터뜨리지 않아도 핵무기 폭발 이후 상황으로 인류를 서서히 내몰고 있다. 5500만년 전에도 지금처럼 이산화탄소가 급속히 늘어난 적이 있다. 바다는 산성이 되고, 많은 바다생물이 멸종했다. 당시 이산화탄소의 급격한 확산으로 지구 평균 기온 5도 상승에 수천 년에서 최대 2만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날 이산화탄소 증가 속도는 당시에 비해 10~30배 빠르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200년 만에 지구 기온이 1도 상승한 것만 봐도 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는 전례 없이 긴급한 상황이다.

기후 위기 극복에는 왕도가 없다. 탄소 배출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재생에너지 기술을 도입하고, 카본싱크(carbon sink·탄소흡수원·온실가스를 흡수하는 삼림·해양·토양)를 넓히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전체 상황을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기후 거버넌스가 문제다. 기후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주체는 정부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지방자치단체, 기업, 시민사회, 학계, 개인 등이 모두 포함된다. 지난 20년 동안 국제사회는 온실가스 배출 저감을 위한 국제 협력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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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P

UNEP는 환경문제를 전담하는 유엔의 최고 기구다. 기후 위기, 생태계관리, 자연재해, 환경 갈등, 자원의 효율성, 유해 폐기물 등을 포함한 환경 이슈를 다룬다. UNEP는 많은 국제환경조약의 성공적인 추진에 기여해 왔을 뿐만 아니라 UNFCC와 IPCC를 지원함으로써 기후 거버넌스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UNFCCC

UNFCCC는 교토의정서와 파리협약의 모태가 됐다. 교토의정서에서는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2년까지 1990년 대비 6~8% 낮추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지만 과학자들은 이 같은 목표가 너무 온건하다고 비판했다. 특히 교토의정서에는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0%를 차지하는 미국의 불참으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2016년에 발효된 파리협약은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회원국 모두에 의무를 부과한다. 파리협약의 핵심은 국가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다. 회원국의 NDC 내역은 UNFCCC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 한국은 2030년까지 NDC를 2018년 대비 40% 감축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협의체(IPCC)

IPCC는 방대한 과학적 협업 기구다. 합의를 중시하고 검증된 연구 결과만을 다루기 때문에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IPCC는 유엔 회원국들의 기후정책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가능한 한 자제하는 편이다. 기후 위기는 지구상에 인류가 탄생한 이후 처음으로 공통 목적을 위해 모든 차이점을 딛고 합의한 어젠다다. 이를 위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국제적 노력이 필수적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 노력은 국내적 노력과 병행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호주 정부의 '기후정의 프로그램' 연구책임자이던 리처드 히드(Richard Heede) 박사의 2014년 연구 결과에 의하면 1854년부터 2010년까지 글로벌 탄소 배출량의 63%는 90개 대기업이 배출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석유·가스·석탄 회사이다. 시멘트 회사도 7개가 포함돼 있다. 그리고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들이 배출한 탄소가 지구온난화의 50%(0.4도 상승), 해수면 상승의 32%(5.7㎝ 상승)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는 기후 위기가 산업활동, 경제활동과 불가분 관계에 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기후 위기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한계라면서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는 현재 경제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서구적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경제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아직 확립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후 위기가 초래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 실패 원인으로는 국가의 내부 행위자, 즉 공동체·기업·개인을 들고 이들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세계질서에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는 말이 있다. 달팽이 뿔처럼 작은 것을 놓고 다툰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위기는 기후 위기에 비하면 와각지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소모적인 싸움을 멈추고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달팽이 뿔에서 내려오는 것. 어쩌면 그 순간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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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민주연구원장) csrimfr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