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자동차 시장은 '출고 지연'으로 몸살을 앓았다. 주문 후 인도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자동차 구매 플랫폼이 국산차와 수입차 출고 시기를 분석한 결과 2개월 전 대비 1개월 이상 대기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자동차 출고 지연은 반도체 공급 부족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전과 컴퓨터 등 정보기술(IT) 기기 전반에 가해지는 타격도 만만치 않다. 새해에도 반도체 공급 부족은 지속될 것으로 우려된다. 코로나19로 공급과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탓이 크다. 코로나19 초기에는 자동차 시장의 급격한 위축이 예상됐다. 반도체 제조사도 설비 투자에 나서지 못했다. 생각보다 수요는 빨리 회복됐다. 주문이 몰리면서 반도체 생산 라인에는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고객사가 원하는 시기에 적절한 양을 공급하지 못했다. 그 결과 유례없는 반도체 부족 사태를 겪었다.
최근 반도체 제조사가 잇달아 설비 투자에 나섰다. 앞으로 증가할 수요를 고려하면 대규모 선행 투자가 불가피하다. 반도체 특성상 생산 라인 가동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공급이 늘면 수요를 어느 정도 만족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공급과 수요는 자체 시장 회복력에 기댈 법하다. 그러나 반도체 시장에 드리운 더 크고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바로 공급망을 둘러싼 국가별 패권 다툼이다. 반도체만큼 세계적 분업화가 잘 이뤄진 산업도 없다. 반도체 설계와 자산(IP) 능력은 미국이 강하다. 소재는 일본 역할이 크고, 원재료는 중국이 맡는다. 반도체 장비는 미국과 일본, 패키징은 동남아시아 비중이 크다. 시스템 반도체는 미국,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각각 주도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에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급망은 기업과 국가 협력을 요구한다. 특정 기업이든 나라든 반도체 소재부터 패키징까지 전체 공급망을 좌우할 순 없다. 글로벌 분업 시스템에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세계 패권 다툼에서는 반도체가 무기로 쓰인다. 반도체 생산 거점 확보를 넘어 아예 공급망을 거머쥐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19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을 막은 것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시장에서 자국 중심 산업 전략과 보호무역주의는 득보다 실이 크다. 일본의 수출 규제도 우리나라의 소재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큰 실리를 챙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의 소재 부문은 중요하니 그만큼 반도체 분업시스템이 강력히 유지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분업시스템을 인정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면 시장이 왜곡되고 각종 부작용을 낳는다. 반도체 공급난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이유다. 올해에는 글로벌 반도체 분업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바란다. 반도체 공급망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길 기대한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