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청 간담회서 산업계 반발
특허권자 유리한 증거수집제도
기술 앞선 해외업체 줄소송 지적
'한국형 증거수집제도'(K-디스커버리) 법제화를 놓고 특허청과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특허권자(원고)에게 유리한 증거수집제도를 시행하면 반도체 기술 패권을 쥐고 있는 해외 업체가 국내 업체를 겨냥해 거센 특허 공격을 진행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허청은 9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회의실에서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 관련 산업계 간담회'를 개최했다. K-디스커버리는 새로운 증거수집 제도다. 특허권자가 피고 측 증거 조사를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기존에 활용이 미미하던 자료 제출 명령 제도를 개선하고, 법관이 지정한 전문가가 피고의 생산 설비 등을 방문해 증거를 수집할 수 있다는 것이 달라진다. 특허권자의 권리가 기존보다 철저하게 보호되면서 물리적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특허청 설명이다. 특허청 관계자는 “국내 산업계 전체 입장을 생각하면 이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제도 취지는 좋지만, 시기상조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기술 우위로 다수의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는 해외 소부장 업체가 후발 주자인 국내 업체에 특허 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칩 제조사별 공정과 규격이 대동소이한 반도체 공정 특성을 고려하면, 이미 세계 장비업계 점유율 50%를 확보한 해외 업체들이 국내 신흥 경쟁사 진입을 막을 때 용이하게 활용하면서 국내 소부장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비업계 관계자는 제도가 도입되면 당장 매출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특허권 우위를 쥐고 있는 미국·일본 소재업체의 무차별적 증거 수집 소송으로 아예 판매와 연구개발(R&D) 자체가 멈출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특허공제 제도로 25억원 지원, 중소기업 지원센터 설치 등을 통해 해외 장비업체 특허 소송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수십억원 이상의 장비를 판매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간접비용의 무게가 훨씬 크다”고 설명했다.
'국내 소부장 특허 경쟁력' 통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정부는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램리서치·도쿄일렉트론(TEL)의 특허 유효 건수가 5476건, 국내 주요 장비업체 10곳의 특허 건수가 4248건으로 특허 경쟁력이 열악한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는 업체별 경쟁력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1위 장비업체 세메스의 특허 유효 건수를 제외하면, 국내 업체 유효 건수는 1900건이다. 회사당 평균 특허 유효 건수가 약 10배 차이가 난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경쟁력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성장하고 있는 국내 업체가 특허 분쟁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는 “해외 소부장 업체가 공격적으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면서 “당장 증거수집 제도가 활발해지면 반도체 소부장 업체의 성장이 막히고 소자 업체와의 협력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바람직한 제도지만 시간을 두고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