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자연에서 배우는 생태모방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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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찍찍이'로 불리며 운동화나 옷 소매, 건축자재 등에 물건을 쉽게 붙이고 뗄 수 있는 '벨크로 테이프'는 우리에게 익숙한 제품이다. 벨크로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쓰이지만 원래 상품 브랜드이자 회사 이름이다.

1941년 스위스 엔지니어 조르주 드메스트랄이 개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사냥에서 돌아온 개의 털에 도꼬마리 가시가 달라붙어 있는 데서 착안한 제품이다. 드메스트랄은 도꼬마리 가시를 모방한 작은 돌기 이용 잠금장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벨벳을 뜻하는 블루르와 걸쇠를 뜻하는 크로셰를 결합해 '벨크로'라고 이름 붙였다. 그후 드메스트랄은 1955년에 특허권을 획득하고 상품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우주항공국(NASA)이 벨크로를 유니폼과 우주선 등에 활용하면서 산업화 성공을 입증했다. 이후 1970년대에 해당 특허권은 소멸됐지만 벨크로는 지난해에만 이 제품으로 171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도꼬마리 같은 생물의 모습이나 행동을 모방해서 우리 실생활이나 산업에 적용하는 것을 '생태모방기술'이라 한다. 생태모방기술은 우리 생활과 산업 속에 깊게 뿌리 내렸다.

최근 수영선수는 일반 수영복보다 무거운 전신수영복을 입는다. 전신수영복이 물의 저항을 줄여 주기 때문이다. 상어 피부가 물의 움직임 방향으로 홈이 파져서 물의 저항을 줄여 준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이에 적용한 것이다. 이른바 '리블릿 구조'다. 이는 비행기나 유체역학이 적용되는 산업에 활용된다. 실험에 따르면 리블릿 구조는 수영복의 항력을 최대 8%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활발하지는 않지만 국내에도 생태모방기술을 적용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LG전자가 개발한 고효율 에어컨 실외기 팬이다. 해당 실외기는 혹등고래 가슴지느러미의 혹 형상과 조개 표면의 홈 구조를 모방했다. 이를 적용해 소음은 2데시벨(㏈), 소비전력은 10% 각각 낮췄다.

충남 서천에 자리한 국립생태원도 지난 2016년부터 생태모방기술에 관심을 쏟고 있다. 국립생태원은 생태모방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했고, 도토리거위벌레가 큰 턱을 이용해 나무 안쪽을 확장해 가며 파는 모습에 착안해 이를 확공용 드릴에 적용했다. 2017년에 시제품 드릴을 제작했고, 지난해부터는 매립지 굴착에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 밖에 새 깃털의 색 구현을 연구해서 디스플레이 표면 공정에 적용하거나 솔방울의 흡습 기능과 개폐 원리를 응용한 기술 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국내에서 생태모방기술 연구를 시작했지만 아직 항공, 우주공학, 해양, 건축 등 분야에서 활발하게 적용하는 선진국에 비하면 초보 단계다. 동물이나 생물에 대한 과학 연구가 부족하고, 이를 담을 수 있는 지식 플랫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국립생태원이 생태모방기술 플랫폼을 오는 2023년까지 만들 계획이다.

생태모방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길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지금처럼 인간이 만든 산업화로 인한 기후 위기를 맞는 시대에 자연과 공존하며 적응할 수 있는 생태모방기술은 자연 훼손을 줄이면서 인간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생태 모방이 곧바로 산업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흡사하다 할 수 있다.

벨크로를 개발한 드메스트랄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벨크로를 만들기까지 10년의 연구 과정을 거쳤다. 과거에 비해 다양한 지식 융합으로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만 기술이 실제 상용화로 이어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생태모방기술이 자연을 닮는 지혜인 것처럼 기술이 상용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도 기술 연구에 중요한 뒷받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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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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