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우리나라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799개사의 시가총액은 1476조원, 애플은 1조2900억달러(약 1498조원)다. 삼성전자 등 우리나라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799개사를 합친 기업 가치보다 큰 애플 1개 사가 미국 주가지수를 이끌고 있다. 애플을 위시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모회사 알파벳,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국 5대 테크 기업의 시가총액(4조9541억달러)은 2018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3위인 일본(4조9709억달러)과 비슷하고 우리나라의 3배 규모(1조7209억달러)이다. 그 배경은 정보 저수지인 세계 플랫폼 독과점,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 기술 구축이다.
미국 테크기업은 혁신을 지속적인 기반으로 시대를 읽는 통찰의 힘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다.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스타트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증시로 유입된다. 지난해 주가 상승 폭 3천%를 기록한 액섬 테라퓨틱스(Axsome Therapeutics)를 비롯해 스타트업의 선순환이 멈추지 않는다. 차세대 혁신 주자들이 끊임없이 증시에 도전장을 내민다.
세계 기업 2500개를 분석한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의 “2018 산업R&D 투자 스코어보드 분석”에 따르면 전체 R&D 투자의 40%가 세계 50대 기업에 의해 이뤄지고 상위 50개 투자기업에 미국 22개, 유럽연합 17개가 있다고 보고한다. 우리나라는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현재 미국 테크기업은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는 투자를 하고 있다. 최근 관심 있는 자율주행차 연구는 이미 10여년 전 대규모 투자를 했었다.
미국 테크 기업은 2000년대 인터넷, 2010년대 모바일, 2020년대 플랫폼 등 기술 변곡점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왔다. 빅데이터를 학습하면서 진화하는 AI는 손 안의 폰에 깔린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플랫폼을 드나드는 수십억명의 세계인이 검색한 것은 무엇인지, 어떤 제품을 사는지 등을 들여다보고 분야별 최적 전략을 내놓아 제품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신기술에 돈을 쏟아붓고 시대 변화 통찰의 힘을 길러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미국 테크 기업의 배경에는 네거티브 규제가 있다. 불법으로 규정한 것 외에는 모두 자유롭게 허용한다. 허가된 것만 할 수 있는 포지티브 규제와 정반대다. 규제하려는 생각이 반대 방향이다. 미국 기업이 자율주행차, 차량공유와 같은 모빌리티 사업, 원격의료 등 새로운 서비스를 선점한 배경에는 규제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사업을 펼쳐 가면서 시장의 평가를 받는 시스템에 있다. 악성 시스템을 놔둔 채 혁신이 일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포지티브 규제 체계로 혁신에 어려움이 있다. 우리나라 법체계는 '원칙 허용, 예외 규제'의 네거티브 방식 대신 '원칙 금지, 예외 허용'의 포지티브 방식으로 돼 있다. 다양하게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야 하는 혁신 신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지체되는 이유다. 정부는 샌드박스 등 네거티브 방식을 일부 도입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포지티브 방식에 매여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후 규제로 신산업을 관리하는 미국, 중국 등과 차이가 난다.
최근 교통 혁신이 활기를 띠고 있다. 차량공유로 시작해 자율주행차, 개인용비행체(PAV)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애리조나 등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고객을 태우는 자율주행 택시 사업을 허용하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3년 이상 기존의 자동차 안전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 일본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고령 노인이 많다. 노인이 생활필수품을 사거나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려면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토요타가 축적한 자동차 정보와 소프트뱅크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한 합작 기업 모네가 자율주행차를 개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모빌리티 사업을 하기가 어렵다. 첨단 모빌리티 기술을 갖춘 상당수 기업이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사업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초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하늘을 나는 차'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사업 파트너는 세계 1위 차량공유 회사 우버다. 현대차는 차량공유와 자율주행차 사업도 해외에서 진행했다. 동남아 최대 차량공유 기업 그랩과 인도 1위 업체 올라에 투자했다. 미국 앱티브와는 자율주행차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의 과도한 규제를 법과 제도로 정비, 기업이 해외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 테크 기업이 오대양 육대주에 펼쳐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한다. 21대 국회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가를 육성하기 위해 규제를 줄이는 등 제대로 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 모든 구성원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잠재해 있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
윤병섭 서울벤처대학원대 융합산업학과 교수 yoonbs@sv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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