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기업, 개인을 불문하고 위기는 기회다. 위기는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해 틈새를 벌리거나 질서 자체의 재편도 촉발한다.
위기는 벗어나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위기가 수반하는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면,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다. 평시에는 엄두도 못 냈던 과감한 조치가 위기에서는 용납될 수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정부는 코로나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라며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다. 과연 위기는 기회라는 명제에 걸맞은 내용을 담고 있을까.
먼저 데이터 구축 부문부터 살펴보자. 6대 데이터 수집, 개발·결합, 거래, 활용이란 정책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그동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부가가치화는 극히 미미한 수십만 건의 공공데이터 탓이다. 그 '실패 경로'의 철저한 복기에 기초한 정책이길 바란다. 인공지능(AI) 데이터 확충에는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일반 수요 조사에 따른 300종 이상의 학습데이터에 대한 파편화된 투자는 자칫 매몰 비용이 될 소지가 크다. 구축 방식으로는 건별 프로젝트 체계보다 지속적인 확장과 유지·보수를 담보할 수 있는 체계가 요청된다. 인터넷 기반 크라우드 협업 방식도 고려해 봄 직하다.
'전산업 AI 융합 확산' 과제는 크게 공감한다. 단 훈수를 하나 둔다면 시스템통합(SI) 성격의 사업 형태는 지양하는 게 좋다. 이런 형태에서는 투자 재원의 대부분이 핵심 기술 자체보다 설비 구매와 구축 용역비에 배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소프트웨어(SW) 컴포넌트나 부품 개발 사업 형태를 추천한다. 투자 효율성뿐만 아니라 AI가 요소 기술이란 점에서 더 적합하다. 취약한 SW 산업과 첨단부품 분야의 국제 경쟁력을 향상할 수 있는 길이다. 기존 스마트팩토리 사업에 연계시키는 것도 시너지를 높일 수 있는 방편이다.
'비대면 산업' 육성이라는 과제는 정체가 불분명하다. '비대면 산업'이라는 신산업이 존재하는 것일까. 영어 번역어인 '언택트 비즈니스'는 구글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다. 비대면 산업이라고 포장된 원격회의, 원격협업 같은 분야는 마이크로소프트(MS) '팀스'나 구글의 스위트(G 스위트) 같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오래전부터 장악하고 있으며, 시장도 작아 디지털 뉴딜에는 걸맞지 않다. 신산업 육성이지만 발표 내용은 교육환경, 원격의료 등을 비대면 기술을 활용하는 이른바 '정보기술(IT) 활용'에 방점이 찍혀 있다. 외산 IT 장비나 SW에 의존한 IT 인프라 구축 및 활용 공식에 익숙해진 탓에 이번에도 'IT 활용'을 'IT 산업육성'으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미국의 뉴딜은 실업구제와 경기회복을 위한 대공황 위기 극복 정책이다. 테네시강 유역 댐 건설 같은 일자리 사업이 뉴딜 브랜드로 꼽히는 이유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 자유방임 시장자본주의의 폐해로 심하게 곪아 있던 상태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빌미로 그동안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된 진보적 제도개혁 의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미국의 황금기 기초를 놓았다. 뉴딜이 실업구제나 경기회복 면에서 별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후대 경제학 사가들이 뉴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경직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조직과 거버넌스, 부실한 학부 인력 양성, 신사업의 답보상황 등 우리의 혁신 환경도 매우 취약하다. 손보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디지털 혁신'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뜯어보면 거의 다 생존권 차원의 이해충돌로 말미암아 과감한 개혁적 조치가 어려운 의제들이었다. 이번 위기 상황은 개혁의 호기다. 자식 세대에 빛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과감한 재정 투입에 눈감아 준 국민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제도 개혁은 당위성이 있다.
디지털 뉴딜은 단순히 범부처 합동 대책에 의한 백화점식 정부 주도 시범사업 실시라는 그동안의 실패 공식에 갇히지 않기 바란다. 디지털 제품과 서비스의 생산량 및 디지털 기술 활용으로 창출된 부가가치 합이 디지털 경제의 총량이다. 이번 디지털 뉴딜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플랫폼 기업이나 견실한 SW 산업 육성 같은 디지털 경제의 핵심 인프라 확보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전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실질적인 일자리는 효율 혁신보다 파괴적 혁신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뉴딜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실질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파괴적 혁신 산업의 육성 방안도 들어 있어야겠다.
종합계획 완성은 아직 한 달 남짓 시간이 남아 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뉴딜정책을 설명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에 귀를 기울이던 그런 간절한 심정처럼 '나이스 샷'으로 호응할 수 있는 한국판 뉴딜 정책을 기대해 본다.
김희철 대구대 AI센터 소장(IT융합학부 교수) hckim@daeg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