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 일종인 전문연구요원(전문연)의 정원을 당초 최대 절반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예고했지만 '최소 감축'으로 선회했다. 박사과정 전문연 정원은 유지하고 석사 정원만 소폭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제도 개선 논의 초반에는 형평성 논리를 앞세웠으나 일본 수출 규제라는 중대 변수가 상황을 바꿨다. 핵심 소재부품장비 자립화가 시급 과제로 부상하면서 전문연 역할이 대두됐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전문연이 역할이 필요하다는 과기계 목소리도 더해졌다.
제도도 상당 폭 뜯어고쳤다. 중소·중견기업 기여도를 높이는 동시에 그간 문제가 된 근무 환경, 근태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과기계에선 '선방'이라는 평가와 아쉬움이 동시에 나온다. 감축 규모는 줄었지만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해 기술경쟁력이 안보와 직결되는 상황을 겪고도 전문연 규모를 감축한 대목은 아쉽다는 반응이다.
◇전문연 정원 2500명에서 2200명으로
정부는 21일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대체복무제도 개선안'을 심의 확정했다. 2002년 이후 수차례 논의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대체복무 배정인원 감축 방안을 마무리한 것이다. 국방부와 관련 부처는 지난해 12월 TF를 구성하고, 11개월간 협의를 거쳐 최종안을 도출했다.
산업지원 분야 대체복무 배정인원은 최소한으로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관심을 모았던 전문연 정원은 현행 2500명 규모에서 2200명으로 축소한다. 전문연은 이공계 석·박사 과학기술인력이 과학기술원, 대학, 기업에서 일정기간 종사하면 복무를 인정하는 제도다. 감축 비중은 12%다. 다른 대체복무 유형 감축 비중은 20% 내외로 전문연 정원이 상대적으로 덜 줄어든다.
박사급 정원은 현행 1000명으로 유지한다. 구혁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장은 “박사과정 전문연은 소재·부품·장비 분야 지원책을 마련하는 과정 등에서 고급 이공계 연구인력 양성이 전 국가적 과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현 규모를 유지하되 복무를 강화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석사 전문연 배정인원은 1500명에서 1200명으로 줄어들지만 시급성이 요구되는 소재·부품·장비 관련 분야 중소·중견기업에 배정되는 인원은 늘어난다.
석사 전문연 중소·중견기업 배정인원은 올해 1062명에서 2020년 1200명으로 증가한다. 현재 정부출연연구소, 대학연구소에 복무하는 전문연 정원은 500여명이다. 이 가운데 300여명을 감축하고 200여명을 산업계로 전환한다. 출연연, 대학연에 복무하는 석사급 정원은 없어진다.
정부는 감축되는 출연연, 대학연 정원은 일반 채용과 더불어 박사급 전문연 배정을 통해 해결할 방침이다.
과기부 관계자는 “중소·중견기업 전문연 정원 확대에 있어 '소부장' 관련 기업에 우선 배치한다는 방침을 세운 상태”라면서 “향후 업종 관련 구분 기준 등을 확정하고 이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결정은 2022년 이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한다. 정부는 이후 추가 감축 논의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과기계는 정부 결정에 안도하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당초 감축 계획이 상당 폭 완화된 것은 반겼다. 정부가 기술 자립화, 중기 지원을 외치면서 일부 정원을 감축한 결정은 고육책이라기보다는 타 복무제도와 형평성만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도 있다.
과기계 관계자는 “타 대체복무제도에 비해 감축 규모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문연 정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던 만큼 감축은 아쉬운 대목”이라면서 “연구, 기술 경쟁력 또한 안보와 다름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복무제도와의 균형을 감안해 석사급 정원을 감축 대상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절반 줄인다던 국방부, 소부장 위기에 정책 선회
국방부는 인구 감소 현상에 따른 병력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당초 대체복무 정원을 대폭 감축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2024년까지 전문연구요원을 현재 수준의 절반에 못 미치는 1100~1200명까지 줄이는 방안도 포함됐다.
2025년께 병역 대상 인력이 연간 7만명가량 부족하다는 주장을 근거로 감축 계획을 이행하겠다는 강경 자세를 유지했다.
지난 7월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 이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가 핵심 소재·부품·장비 자립화 관련 R&D 투자를 대폭 늘리면서 정부·민간 분야 연구 인력 수급이 선결과제로 부상했다.
연구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은 전문연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국방부 계획이 실현되면 기업 경쟁력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 평균 연구원 수는 2007년 8.3명에서 2017년 4.3명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30대 이하 연구원 중 석·박사 비중은 20대가 21.3%에서 14.2%, 30대는 58.9%에서 41.5%로 각각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 R&D 인력 가운데 전문연 비중은 기업별로 10~50%를 차지한다는 것이 업계 주장이다. 석·박사급 R&D 인력으로 시야를 좁히면 사실상 대다수가 전문연에 의존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까지 전문연구요원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체복무제도 개선 논의는 또 다시 변곡점을 맞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 김포 소재 한 중소기업을 찾은 자리에서 “병역 특례의 경우 병역 자원 (감소) 때문에 전체적으로 늘릴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가급적 중소기업 쪽에 많이 배분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R&D 정책 지원을) 좀 더 중소기업 쪽으로 배분하고 이 국면에서 부품 소재 산업 경쟁력 높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후 국방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관련 부처 협의는 정원 감축보다 제도 재설계 논의로 흘렀다.
병역 자원 감소로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국방부 의견대로 정원을 감축하되 최소 규모로 제한하고 대신 전문연의 중소기업 기여도, 효용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전문연 운영 방안 협의 과정에서 일본 수출규제, 소부장 이슈가 발생하면서 논의 틀이 바뀐 것이 사실”이라면서 “산업 측면에서 전문연이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협의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