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협력을 통해 개방 무역을 하는 국가는 번영하지만 자력 갱생을 독자로 추구한 국가는 몰락한다. 극일은 경제적으로 일본을 앞서는 것이며, 일본에 대한 감정 대응은 바람직하지 않다.” 얼마 전 작고한 이민화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로 어려움에 부닥친 우리 산업계를 걱정하며 생전에 남긴 최근 글이다.
벤처 1세대 대표 기업인으로서 국내 벤처 생태계 조성을 위해 헌신해 온 이 회장은 마지막까지도 대한민국의 규제 개혁과 4차 산업혁명 선도를 위해 활발히 활동해 왔고,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서는 국민의 냉정한 이성 접근을 당부했다.
이 회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는 외교〃정치 문제에서 비롯된 단순 사건이 아니라 미-중 무역 분쟁으로 수혜가 예상되는 한국을 견제하고 반도체 대국으로 재부상하기 위한 일본의 치밀한 전략일 수 있다.
지난달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가 발표한 '세계 전자산업 주요국 생산 동향 분석'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 세계 전자산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생산 비중은 8.8%로, 일본(6.2%)을 제치고 중국(37%)과 미국(12.6%)에 이은 세계 3위 규모다.
한국은 과거 일본이 독보하던 분야인 TV·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에서 독점 체계를 허물어뜨렸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역대 최고 실적을 올리면서 전자부품 비중이 확대돼 경쟁국인 일본에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의 첫 수출 규제 품목이 반도체 핵심 소재가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동안 대기업이 고가에도 우수한 품질과 안정 공급이 가능한 일본 제품을 선호한 것은 공정 과정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나름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라는 비정상 사태가 발생했고, 이제는 대기업도 핵심 소재〃부품의 거래처 다변화와 국산화를 위한 중장기 전략을 신속히 가동해 외부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도 흔들림 없는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최근 벤처기업협회가 국내 벤처기업 330여개사 대상으로 실시한 일본 수출 규제 관련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출 규제 대상이 된 품목을 포함해 향후 규제 확대 추가가 예상되는 소재 분야의 국산화 가능 여부에 대해 응답자 80%가 품목에 따라 1~3년이면 국산화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벤처기업인 스스로가 우리 기술의 가능성을 긍정 평가한 것이다.
반면에 벤처기업은 오랜 기간 연구개발(R&D)을 통해 국산화에 성공하더라도 납품할 곳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벤처기업협회는 벤처기업과 대기업이 동등하게 협력해서 벤처기업이 장기간 R&D를 통해 개발한 우수한 제품으로 대기업의 기술 수준을 배가시키는 '팀 코리아' 전략 호소를 지속해 왔다. 더 늦기 전에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핵심 소재〃부품 국산화와 개방형 혁신을 협의하는 민간 차원의 상설협의체 운영을 통해 R&D 지원 및 판로 확보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또 제조 분야의 기술벤처 육성을 위해 기존 성공 중심의 R&D에서 벗어나 실패를 용인하는 R&D 지원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산업 현장에서 곧바로 적용 가능한 수준의 시험 테스트베드를 설립, 자금력이 부족한 벤처기업이 신기술·신제품을 시험할 수 있는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도 절실하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가 단기로 보면 관련 기업에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다면 제조 분야의 기술벤처 경쟁력을 높여서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 핵심 소재 국산화를 이뤄내는 전화위복의 기회도 될 수 있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 charles@kov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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