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산업단지가 올해 50년을 맞았다. 구미산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섬유에서 출발해 첨단 IT기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 심장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국내외 경제여건 악화와 대기업 생산라인 해외이전·인력유출 등 악재가 겹치면서 '전자산업 수출기지'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거대한 4차 산업혁명 물결에 대응하고 국가 경제를 이끌던 전자산업 수출메카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엔진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상북도와 구미시는 오는 9월 50주년 기념식에서 구미산단 미래를 준비할 새로운 비전을 발표할 계획이다. 구미산단이 향후 50년 먹거리를 마련해 국가 경제 중심축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농촌마을에서 근대화 주역으로
구미산단이 들어선 경북 구미는 50년 전 경상북도 선산군의 한 읍이었다. 농업 중심 지방 소도시였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자공업을 국가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하면서 '전자공업진흥법(1969년)'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을 잇따라 제정했고, 구미산단(당시 구미공단)은 이 법을 근거로 출발해 50년 역사를 쌓았다.
1971년 5월 한국전자공업공단이 설립됐다. 첫 임무는 바로 구미전자단지 조성. 1969년 9월 조성 인가를 시작으로 진행한 구미1단지 조성공사는 1973년 12월에 마무리됐다. 구미산단 1호 기업은 KEC 전신인 트랜지스터 생산기업 한국도시바였다. 1970년에 설립됐다.
구미는 당시 고속도로와 철도, 지방 국도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용지가 풍부했고 원활한 용수공급이 가능했다. 인근 지역 노동력 확보가 용이했고 내륙에 위치해 바닷가 염분으로 인한 기계손상 걱정이 없었다. 전자산업을 일으킬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구미2단지는 그로부터 4년 뒤인 1977년에 조성을 마쳤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반도체와 컴퓨터산업 등 기술집약적 첨단산업 육성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그 후 1980년대 초반 제2차 석유파동, 1980년대 중반 3저(낮은 석유가, 달러와 가치, 국제금리) 호황으로 경기가 호전되면서 1996년 6월 구미4단지가 지정돼 지금의 구미산단 모습이 완성됐다.
구미산단은 조성 초기 전형적 수출산업단지였다.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가전 3사(금성, 삼성, 대우)와 코오롱, 제일합섬 등 섬유 대기업이 입주 수출을 이끌었다.
구미산단이 조성되면서 구미시 인구는 급증했다. 조성 전 1968년 2만1357명에서 1974년엔 5만5075명으로 2.6배나 증가했다. 1963년 읍으로 승격된 뒤 15년 만에 시로 승격된 것만 봐도 구미산단이 구미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수 있다.
구미산단 수출액도 1971년 800만달러로 전국 수출액 10억6800만달러의 0.7% 수준이었지만 구미1단지가 조성된 1973년에는 4500만달러, 1975년엔 1억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엔 8억달러 이상을 수출, 국내 수출 4.6%를 차지했고, 1990년에는 국내 수출의 7~8%를 차지할 만큼 급성장했다.
입주기업과 근로자수도 1971년 각각 11개사, 1131명에서 2018년에는 2393개사 8만6751명으로 급증했다. 업종도 1980년에는 전체 입주기업 중 섬유가 113개사 51.6%, 전기전자가 91개사로 41.6%였지만 1990년에는 전기전자가 45.5%, 섬유가 41.1%로 전기전자 IT업종이 역전했다. 2013년 말 현재 생산량 측면에서 보면 전기전자업종이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명성 잃어가는 '전자산업 메카'
구미산단의 쇠락은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디스플레이와 모바일 분야 생산기지였던 구미산단 수출이 2008년 첫 감소세로 돌아섰다. 2007년 구미산단 총 수출액은 378억5800만달러로 매년 증가해왔지만 이듬해인 2008년에는 373억9200만달러로 줄었다.
1975년 1억달러를 돌파한 뒤 매년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성장세가 꺾인 것이다. 이 같은 감소추세는 지금까지 이어져 2015년 수출액은 342억달러에서 지난해 249억달러로 주저앉았다. 지난 10년 동안 구미산단 수출액이 34%나 줄어들었다. 국내 전체 수출비중도 2008년 당시 10%였다가 지금은 4%로 떨어졌다.
가동률도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87.9%에 달하던 가동률은 2017년 70% 아래로 떨어진 뒤 지난해는 68.8%까지 주저앉았다. 올 1분기 가동률은 전국 산단 중 최저인 65.9%까지 내려갔다.
전국 산단 평균 가동률(76.9%)을 크게 밑돌고 있다. 2012년 이후 전국 평균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구미산단 실제 가동률은 이보다 더 낮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소기업 가동률은 이보다 심각하다. 지난해 3월 기준 종업원 50인 미만 사업장 가동률은 34.8%다. 가동률 하락은 근로자수 감소로 이어졌다. 2015년 당시 근로자수가 9만 8300명으로 10만명에 육박했지만 지난해엔 8만6700명으로 감소했다.
실제로 구미산단에는 현재 문 닫은 기업이 즐비하다. 공장 곳곳엔 오래된 전기세와 수도요금 미납 통지서가 뒹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수출기지였던 구미산단이 추락한 가장 큰 원인은 섬유산업 몰락과 대기업 공장 해외이전이다. 특히 대기업은 국내 고임금을 견디지 못해 해외로 공장을 빠르게 옮겨갔다.
협력업체 역시 대기업에 제품을 공급을 위해 구미산단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여기에다 최저임금 상승과 주52시간 근로제가 협력업체 구미산단 이탈을 부채질했다. 그 여파로 구미산단에 인력을 공급해온 지역대학 취업률도 크게 떨어졌다.
산단공 관계자는 “삼성과 LG 등 대기업이 해외로 공장을 옮기면서 산업단지로서의 위상이 급격히 무너졌다”면서 “그 바람에 일자리가 줄고 청년들이 지역을 빠져나가 지역경제가 추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에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특화클러스트 조성사업 유치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물거품이 됐다. 삼성전자 구미 스마트시티 네트워크사업부 일부도 수원에 통합됐다.
구미시는 오는 9월 16일부터 22일까지를 구미산단 5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해 1주일간 다양한 공연을 펼칠 예정이지만 썰렁한 축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래 50년 달릴 새로운 엔진…희망 불씨 지핀다.
경기불황과 대기업 이탈, 기업투자위축, 청년 일자리 감소 등 다양한 악재로 구미산단은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희망의 불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상북도와 구미시는 구미형 일자리와 구미산단5단지(하이테크밸리) 조성사업을 통해 새로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광주에 이은 두 번째 지역 상생형 일자리 창출 모델인 구미형 일자리 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LG화학이 구미산단에 전기차 배터리 핵심소재인 양극재 생산공장을 건립할 계획이다. 총 투자금액은 6000억원이다. 이를 통해 1000명 이상 고용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 LG화학은 경상북도, 구미시와 사업 타당성 검토를 마친 뒤 이르면 이달 말 안에 협약을 체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미형 일자리는 근로자 임금을 낮추는 광주 모델과는 달리 투자촉진형 모델이다. 지자체가 세금감면과 공장부지 제공, 인력확보 지원, 직원 주거대책 지원, 행정절차 간소화 등 최대한 지원할 계획이다.
구미형 일자리 사업으로 LG화학이 입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구미산단5단지 활성화도 기대할만하다. 구미산단5단지는 사업시행자인 한국수자원공사가 구미시 산동면 해평면 일원 934만㎡ 부지에 1조9000억원을 투입, 2020년 준공할 예정이다. 현재 분양률은 28%로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구미시는 이곳에 전자, 정보기기, 신소재 등 미래형 산업을 유치할 계획이다.
구미시는 LG화학이 입주예정인 구미산단5단지에 중소기업 임대전용단지 조성, 입주업종 확대,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 육성, 스마트팩토리 시범단지 조성 등을 통해 구미산단5단지 활성화를 꾀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경상북도는 지난달 말 지자체장, 지역 국회의원, 지역 기업 관계자 등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와 구미산단5단지 분양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구미=정재훈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