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에 서신을 가지고 한양으로 떠나는 방자에게 '행인이 임발우개봉이라 했으니 편지 좀 보자'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행인임발우개봉은 당나라 시인 장적의 '추사'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먼 길 떠나기 전에 혹시 빠진 내용이 있는지 걱정해 다시 열어본다는 뜻이다. 이메일 시대에서는 사라진 이야기다.
이메일은 수신자, 참조자에 주소를 입력하고 제목과 본문을 작성해 발송하는 기본 기능에서 출발했다. 그 후 파일 첨부, 자동 서명, 부재중 회신, 수신 확인 등 많은 기능이 보강돼 오늘에 이르렀다. 이메일이라는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손편지의 유산을 이해하는 것은 디지털라이제이션을 이해하는데 많은 힌트를 준다.
'참조'를 뜻하는 'CC'는 Carbon Copy의 약자로 먹지를 대고 타이핑해서 원본 외에 추가 본을 만들던 시절의 방식이 이메일에 살아 남은 기능이다. 참조까지는 좋은 기능이지만 '숨은참조'를 뜻하는 BCC(Blind Carbon Copy)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숨은참조로 이메일을 보내는 것은 아주 위험할 수 있다. 다른 수신자들에게는 특정인이 수신·참조 리스트에 없는 것으로 해 메일 내용을 작성했는데 BCC 수신자는 자신이 숨은참조로 수신한 것을 모르고 '전체회신' 기능으로 답장을 하면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IT 격언 중에 '할 수 있는 것과 해서 좋은 것'을 구분하라는 말이 있다. BCC 기능은 이 격언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숨은참조 대신 '전달(Forward)' 기능으로 수신자가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구분해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 이메일 개발자는 BCC 기능을 통해 한 단계의 절차를 줄 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더 좋은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디지털라이제이션 과정에서도 솔루션을 도입해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서 좋은 것'을 구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용자의 행동 관점에서 이메일을 살펴보자. P.S.는 Postscript의 축약으로 나중에 덧붙여 말한다는 뜻의 추신 혹은 추백의 의미다. 손편지 시절에는 본문에 빠진 내용을 추가하기 위해 P.S.가 필요했지만 이메일에서는 즉시 편집해 본문에 내용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P.S. 관행이 살아남은 것은 '사람들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와 '작성된 본문을 다시 편집하기 귀찮은 이유'와 '본문에 넣을 정도는 아니지만 약하게 표현하고 싶은 이유' 등으로 살아 남았다고 볼 수 있다. P.S.는 기능의 영역이 아닌 사용자 경험과 수용 영역으로 사용자 행동 변화를 필요로 하는 디지털라이제이션 과정에 고려해야 할 관점이다.
이메일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본래 기능을 넘어서 다양하게 진화했다. 특정 사안의 메일에 회신을 거듭하며 조직의 지식체계에 영향을 미치고 전자결재에 준하는 업무처리 근거와 승인의 역할까지 하게 됐다. 이 과정에 중요한 파일들을 첨부하면서 개인의 파일 서버나 지식 서버로 발전하기도 했다. 조직 내 소통 채널로서 이메일은 사내 메신저와 상호 보완의 형태로 병행되다 최근에는 업무공간이란 뜻의 '스페이스' 개념이 있는 진보된 협업 솔루션이 등장하면서 이메일의 사용이 급감하게 됐다.
'행인임발우개봉' 바로 앞 절은 復恐悤悤說不盡(부공총총설부진)이다. 바쁘게 마무리 하느라(悤悤) 다 말하지 못한(說不盡) 내용이 있을까 또 불안하여(復恐)의 의미다. 이러한 방식의 재점검이 불필요해진 것은 추가의 메일을 언제라도 보낼 수 있는 이메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빠진 기능이나 추가할 요구사항이 없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관리하던 개념은 애자일 방법론으로 극복해야 한다. 빠르게 개발해 즉시 사용하고 필요하면 기능을 추가하거나 다시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강태덕 박사 streetsmartk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