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미국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성공과 굴곡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아온 최고경영자(CEO)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1992년 대한항공 사장을 맡았고, 1999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차례로 오르며 회사를 이끌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키워낸 것은 물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서는 등 민간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2014년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에 이어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한공 전무의 '물컵 갑질'로 조 회장을 비롯한 한진가(家)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 사건은 한진가 갑질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사는 촉매제가 됐다.
직원들 제보로 위법 혐의가 드러나면서 한진가는 국가기관의 조사·수사 대상이 됐다. 조 회장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과 두 딸도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조 회장 역시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조 회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2013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항공기 장비·기내면세품을 사들이며 196억원 상당의 중개수수료를 챙겨 대한항공에 손해를 끼친 혐의(특경법상 배임)를 적용했다. 세 자녀 주식 매매 의혹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를 적용했다.
이같은 혐의는 조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직 박탈에 도화선이 됐다. 대한항공 지분 11.56%를 보유한 2대 주주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고, 지난달 28일 주주총회에서 그는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이로써 조 회장은 1999년 아버지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회사 경영권을 잃게 됐다. 주총에서 총수가 주주 손에 밀려난 첫 사례였다.
조 회장은 사내이사에서 밀려난 뒤 불과 1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 회장은 지난해 미국 현지에서 폐 질환 수술을 받은 후 치료를 받아왔다.
정치연 자동차 전문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