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계도기간 종료를 앞두고 경영계 시름이 깊다. 당장 이달 말 계도기간이 종료되면 범법자가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근로시간 단축 때문에 대·중견기업 10곳 중 7곳 이상이 경영상 애로가 발생하고, 4곳 중 1곳이 초과근무를 하는 실정이다. 이대로 계도기간이 끝나면 혼란이 불가피하다.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중소기업계는 사실상 체념 상태다. 대체 인력을 구할 수도 없고 경기 악화로 존폐 위기까지 몰렸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그나마 해결책으로 꼽힌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연장 논의는 새해에나 마무리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업은 대안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정부가 계도기간 연장 검토 입장을 밝혔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현실을 감안한 보완입법이 이뤄지지 않는 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
◇IT·SW업계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확대, 계도기간 연장 절실
정보기술(IT)서비스·소프트웨어(SW) 업계는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확대와 계도기간 연장을 요구했다. 새해는 교보생명, KB캐피탈 등 대형 차세대 프로젝트가 연이어 시스템을 오픈한다. 최소 3개월 이상 막바지 작업을 위한 철야 근무가 예상된다. IT서비스와 SW업계는 현행법이 바뀌지 않으면 제대로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확대가 어렵다면 대안이 마련되기 전까지 계도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입장이다.
IT서비스와 SW업계는 특성상 선택근로제를 도입했다. 프로젝트마다 착수와 마감 시기, 기한 등이 천차만별이라 탄력근로제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택근로제를 택한 IT서비스와 SW업계는 정산기간 확대를 요구한다. 현행 한 달 내인 정산기간을 최소 6개월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SW업계가 최근 3년간 100억원 이상 프로젝트 사업을 분석한 결과 평균 4~9개월 간 막바지 테스트 기간이 필요하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하는 월 평균 총 근무시간은 215~240시간이다. 현행법대로 한 달 기준으로 정산하면 대부분 기업이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인력 충원을 권장하지만 업계 특성상 쉽지 않다. IT프로젝트는 중간에 신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렵다. 프로젝트 대부분 수개월에서 수년간 준비하는 사업이다. 신입이 중간에 프로젝트에 합류해 안정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가 인원 채용 비용도 프로젝트에 반영되지 않아 업계 비용을 떠안아야하는 상황이다.
채효근 IT서비스산업협회 전무는 “제조업처럼 정형화, 표준화된 일을 나눠하는 개념이 아니어서 프로젝트 완성단계에 대체인력을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라면서 “당장 다음달부터 법 시행 시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도 타격이 크기 때문에 보완입법이 마련될 때까지 계도기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체념한 중소기업계, 존폐 위기까지 언급
근로시간 단축 정책에 대해 중소기업계는 '무대책' 상태다. 대부분 기업은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상당 수 중소기업은 가뜩이나 경기 악화로 존폐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나마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1년 이상 확대에 희망을 걸지만 연내 처리가 요원하다. 이대로는 간간히 들어오는 발주 물량조차 제때 생산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업계에 팽배하다. 가격 경쟁력으로 치고 들어오는 해외 업체에 남은 고객사마저 뺏길 수 있다는 우려다.
금속가공 중소기업 한 대표는 “제도 개선 없이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받으면 해외 고객사로부터 주문을 받아놓고도 제품 만들다 공장을 세워야할 판”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도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큰 방향성에는 공감한다. 다만 우리 경제를 뒷받침하며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최소한의 현실성 고려를 요청한다. 실효성 있는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기업 경영 숨통을 터줘야 다음 논의 단계로 나아갈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계설비 제조업체 인사 관계자도 “근로시간 단축을 앞둔 상황에서 추가 채용이나 설비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면서 “인건비 상승도 문제지만 생산성 유지를 위한 숙련공 수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토로했다.
탄력근로제 도입 요건도 문제다. 다양한 근로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노조 대표자 서면 합의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개별 근로자가 각자 여건에 맞게 탄력근로제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방안을 요구하는 이유다.
양옥석 중기중앙회 인력정책부장은 “경사노위가 출범했지만 아무래도 원만한 논의는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라면서 “국회에서라도 연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1년 이상 확대와 도입 요건 개선을 서둘러 처리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기업도 속타기는 마찬가지, 열에 일곱이 어려워
대한상공회의소의 '주 52시간 근로시간제 기업실태 조사'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로제를 적용한 기업 10곳 중 7곳은 근무시간 단축에 따른 애로를 겪었다.
조사기업의 24.4%는 주 52시간 초과근로가 아직 있다고 밝혔고, 대다수 근로시간 단축 적용기업은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해 여력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5개월간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애로를 겪었다고 응답한 기업은 71.5%였다.
기업이 느낀 애로는 '근무시간 관리 부담'이 가장 많았다. '납기·R&D 등 업무차질' '추가 인건비 부담' '업무강도 증가로 직원불만' 등에 대한 애로도 많았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로는 '탄력근로제' '선택근로제' '재량근로제' 등이 필요하다고 꼽았다.
탄력근로제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기업 58.4%는 단위기간을 확대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탄력근로제를 실제 도입했다고 응답한 기업은 23.4%에 그쳤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기업이 탄력근로제를 충분히 활용하려면 단위기간 확대, 노사합의 완화, 운영방식 개선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경영 부담을 이유로 근로기준법 개선을 호소하는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근로시간단축 보완입법 조속한 마련에 대한 경영계 입장'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올해 주 52시간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보완 입법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계도 기간이 올해 말 끝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고, 도입 요건을 노사 합의에서 협의로 바꿔야 한다는 게 경영계 의견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은 1개월에서 1년으로 늘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경총 관계자는 “경영계는 국회와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근로시간 단축 보완입법을 명확한 일정에 따라 조속히 완결해 주기를 촉구한다”라며 “입법 완료시까지 정부는 계도기간을 연장해 범법적 소지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부, 근로시간 단축 계도기간 연장 검토
원칙대로라면 올해 진행된 시정 위주 주 52시간제 감독이 연말에 끝나고 새해 1월 1일부터 처벌 위주 단속으로 바뀐다. 주 52시간제는 지난 7월 시행에 들어갔으나 정부는 경영계 요구에 따라 올해 말까지 6개월 계도기간을 설정했다. 산업현장에서 준비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반 년간 계도기간을 가졌다.
연말이 다가오자 경영계를 중심으로 계도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한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의 연내 시행이 어렵게 된 만큼 계도기간이라도 연장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이달 말 끝나는 근로시간 단축 계도기간 연장 문제를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논의할 것이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연말까지 정부 입장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임서정 고용부 차관은 최근 새해 업무보고 브리핑 자리에서 “(경사노위 논의 결과를 토대로) 연내에는 (계도기간 연장 여부에 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안에 대한 경영계 주요 의견
[자료:한국경영자총협회]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 비교
[자료:IT서비스산업협회]
함봉균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hbkone@etnews.com, 김지선 SW 전문기자 river@etnews.com, 박정은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