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세종시에 새 터를 마련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내 최고 싱크탱크'라는 명성에 걸맞게 외관부터 학구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곳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정부 경제정책 결정 근거가 되는 연구결과를 밤낮으로 만들어낸다.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 KDI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남북관계가 빠르게 진전되며 높아진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도 KDI에는 그대로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최정표 KDI 원장을 만난 것은 평양에서 3차 남북정상회담이 시작된 지난 18일이다.
최 원장은 “우리 경제에 북한은 새로운 돌파구”라며 “경제제재가 풀리면 경협이 급속 진전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브랜드'가 된 재벌개혁과 관련해선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전제는 법·제도 개선을 통한 압박이다. 새로운 50년을 맞는 KDI 발전 방향을 두고는 “새로운 역할을 해야 한다”며 '50주년 위원회'를 만들어 'KDI 새로운 역할과 비전'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최 원장과 일문일답.
-최근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향후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나라는 과거 고도성장기에 몇 차례 특수가 있었다. 베트남에 파병해 달러를 벌었던 '월남 특수'가 10년, 이후 '중동 특수'가 10년, 다음에 중국 개방에 따른 '중국 특수'가 이어졌다. 이제 새로운 특수를 만들어야 한다.
'북한 특수'가 우리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다. 북한 경제 제재가 풀리면 남북이 윈윈할 수 있다. 북한이 자본은 없지만 석탄, 유연탄, 희귀금속 등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은 많다. 이걸 우리가 국제 시세대로 사주면 북한에도 큰 도움이 된다. 각종 자원, 노동력 등 북한 특수가 우리 경제 새로운 성장엔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북한 특수를 맞는 시기는 언제로 기대할 수 있을까.
▲경제 제재가 풀려야 한다. 그러면 급속도로 진전될 것이다. 여러 가지 예상치 않은 특수도 나올 수 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 때 기업인들이 많이 갔다. 직접 북한을 보고 오면 향후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 경협 추진에는 국가 자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준비를 해 놓으면 (경제 제재 해제 후) 민간자본도, 외국자본도 바로 들어갈 여지가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이런 기회를 대기업이 독점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대기업이 유리하긴 할 것이다. 외국자본도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경쟁이 될 것이다. 중소기업도 나름대로 개성공단 사례처럼 저임금 근로자 등 혜택을 볼 수 있는 부분에서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정부 종합설계도가 마련돼 있을 것이다. 과잉경쟁, 중복투자에 따른 비효율을 없앨 수 있는 전체 구도를 잡아놨을 것이다. 북한과 우리경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어떻게 디자인 하느냐가 핵심이다.
다양한 연구기관 등에서도 이에 대비한 준비를 해왔을 것이다.
KDI도 20~30년 동안 북한 관련해서 축적한 연구 데이터가 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다. 연구기관 등이 여러 대안을 제시하면 정부가 이를 두고 고민할 것이다. 앞으로 KDI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담 과정에서 대기업이 언급되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재벌문제'로 옮겨갔다. 최 원장은 자타공인 재벌문제 관련 전문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등 경력과 그동안 펴낸 각종 저서가 이를 증명한다. 최 원장은 자신을 “재벌문제를 지적한 1세대”로 표현했다.
그는 재벌 경제력 집중 문제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내수시장이 작아 대기업 독점 현상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독점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횡포를 막는 장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벌문제 해결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국내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게 고민이다. 우리나라는 내수가 작다보니 기업 규모가 커지면 독점적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횡포를 부릴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이 중요하다. 공정거래법에는 금지하는 독점 행위가 나열돼 있다. 대부분 공정거래 정책은 독점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내용이다. 시장을 개방해 외국기업이 들어와 경쟁하도록 하는 것도 독점 피해를 막는 하나의 수단이다.
-앞으로 재벌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재벌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이 중요하다. 일본이 고도성장을 해온 것은 전문경영인 때문이었다. 미국은 100년 전에는 재벌이 있었지만 3세로 넘어가면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됐다. 우리도 미국 등 선진국처럼 전문경영인이 실제 의사결정을 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오너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법·제도를 통해 전문경영인 영역이 커지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 핵심 경제정책은 재벌문제를 다루는 '공정경제'와 함께 '혁신성장' '소득주도성장'이다. 그런데 최근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논란이 많다.
▲어떤 경제 정책이든 긍정적·부정적 부분이 있다. 경제 정책 추진으로 혜택을 보는 계층도, 피해를 보는 계층도 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수십만명이 혜택을 본다. 그러나 임금인상으로 혜택을 본 사람은 잘 얘기하지 않는다. 피해를 본 사람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침묵하는 혜택 받은 계층 등)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정책은 철학 문제다. 어떤 정책도 완벽할 수는 없다. 정권 철학에 맞춰 방향을 정하고 실행하면 된다.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 가면 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업을 잃거나 피해를 보는 계층이 있다면 보완정책을 마련하면 된다. 실제 정부가 그렇게 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인상한 지 1년도 안됐다. 일시적 부작용은 보완하거나 개선하고, 후속 정책으로 최저임금 인상 본래 효과가 나도록 해야 한다.
-'혁신성장'을 위한 규제개혁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막연한 규제개혁 목소리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규제개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떤 규제를 어떻게 완화, 혹은 개혁해야 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저 규제가 많아서 사업이 안 된다는 것은 막연한 주장에 불과하다.
일례로 인터넷전문은행과 관련된 은산분리 완화 같이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이 과제는 찬반이 갈린다. 구체적인 사안이 나오면 공론화를 거쳐 답을 찾아가면 된다.
-은산분리는 여전히 거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막는 툴로써 유효하다고 보는가.
▲그렇다. 은산분리에는 재벌의 사금고화를 막는다는 기본 원칙이 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원칙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예외 적용도 논란이 있다고 본다. 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이 금융시장에서 메기 역할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엇갈릴 수 있다.
-KDI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과거와는 역할과 많이 달라진 것 같다.
▲KDI는 2021년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50년 동안 아이덴티티(독자성)를 유지하면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연구기관이다. 그동안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한국경제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면서 많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신뢰를 쌓았다.
앞으로 50년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이전 50년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맞았다. 선진국이 된 것이다. KDI도 과거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과 미션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50주년 위원회'를 만들었다. 우리 경제에 맞는 선진국 모델을 제시하는 게 과제다. 다른 선진국 사례를 검토한 후 한국 나름의 선진국 모델을 찾아야 한다.
-끝으로 우리 경제와 관련,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성장에 집착할 시기는 지났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는 없다. 연간 3% 넘게 성장하는 것은 어렵다. 정부의 올해 전망치인 2.9%는 적정 성장률이라고 본다.
이제는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 과거 고도 성장기 향수에만 빠져서 계속 성장을 강조하면 그 부작용이 클 수 있다. 길게 보고 경제 체질을 개선하면서 내수를 진작하고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최정표 KDI 원장은
1953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진주고,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약 1년 간 미국 워싱턴&제퍼슨대학에서 조교수로 경제학을 가르치다가 1983년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세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1988년부터 올해 8월까지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년 퇴임 후 건국대 명예교수가 됐다.
한국경제학회 이사, 한국국제경제학회 이사, 한국산업조직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경실련 창립 초기부터 참여했고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작년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 싱크탱크인 '국민성장 정책공간'에서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3월 KDI 원장으로 임명됐다.
최 원장은 재벌개혁 사안에 정통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림에 관심이 많아 지난 2007년 호요미(好樂美)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다. 이후 호요미를 '그림을 사는 계모임'으로 바꿔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대담=홍기범 경제금융증권부장 kbhong@etnews.com, 정리=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
사진=김동욱기자 gphot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