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연구 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생활과 산업저변에 확산되고 있는 AI는 이제 단순히 과학기술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예술 분야 연구자도 AI로 인한 변화가 인간 삶의 방식을 어떻게 변모시킬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과학기술 공생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AI 등 첨단과학기술 발전은 인간 정신력과 근력 한계를 보여준다. 또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삶의 조건, 즉 고유 인간성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물음이다.
광주과학기술원(GIST·총장 문승현) 기초교육학부 소속 교수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연구하고 있다. AI 등 새로운 기술과 인간 조건을 비롯해 인간과 비인간 관계, 셰익스피어 문학과 포스트휴머니즘, 로봇법학과 로봇윤리학, 과학철학 관점에서 포스트휴먼 조건 등을 다루고 있다
전자신문은 GIST 교수 3명과 함께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틀에서 AI 시대 인간에 대한 규정을 새롭게 모색하고 인간성 본질에 관한 다양한 윤리·철학 이슈를 살펴보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AI와 인간은 조력자·보호자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AI가 인간지능을 보완해주는 새로운 'AI 문화'를 조성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사회(김한식 전자신문 부장)=2016년 3월, 구글의 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바둑 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장면은 '문명의 충격'이었다. AI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술로 인해 인간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어떻게 봤나.
◇장진호(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4차 산업혁명은 기존 정보통신기술(ICT)을 AI, 빅데이터 등과 결합해 지능화하고 더 긴밀히 연결하는 동시에 융합하는 것이다. 생산·서비스의 개별 맞춤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 증대, 인간 조건 변화와 조정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진보에 따라 필연적인 경로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과 언론, 국내외 각종 회합과 포럼, 정부기구, 글로벌 기업이 이끌어가는 측면도 크다. 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가능성과 정치, 경제, 미디어 환경 문제 등 변화를 포괄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구글이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의 바둑 대결 이벤트를 통해 급진적인 AI 기술 변화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에 대한 언론보도에 정부가 자극받아 새로운 정책 등을 추진하게 됐다. 2016년 초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엘리트들이 모이는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중심 주제로 다뤘다. 이 사실 또한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래 사회 변화의 일반적인 전망이 형성된 사례가 쏟아져 나왔다.
◇최원일(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로봇과의 관계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인간과 로봇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표출될지 등에 대해 섬세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인간관계는 '나'와 '너'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지만 인간관계 본질과 특성이 ICT 발전으로 변모하고 있다.
보통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떠올리지만 ICT 발전은 사람 간 직접적인 만남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서로 만나지 않고 이메일이나 채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등 ICT 발전은 인간관계 개념을 확장시켰다.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는 통상적인 인간관계와는 차이를 보인다. 인간 상호작용은 협력, 갈등, 배려, 공감 등 과정을 수반하고 훨씬 더 많은 인지적, 심리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
◇황치옥(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이후 AI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점에 과연 AI가 계속 발전해 '인간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같은'이라는 표현은 외모나 재질이 다르더라도 기능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사회=최근 들어 포스트휴머니즘이 화두다. 어떤 의미인가.
◇장진호=포스트휴머니즘은 순수하게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세상 중심에 위치해 있음이 당연시돼온 인간 조건에 대한 회의이자 넘어섬을 가리킨다. AI와 로봇 등 첨단과학기술 발전은 기존 인간 정신력과 근력 한계를 보여주거나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삶의 조건, 즉 '포스트휴먼 조건'을 제시한다. 동물과 자연, 기계 등 비인간적 존재와의 공존에 대한 감수성 고양 역시 이 새로운 조건에 대한 인식에 기여한다. 포스트휴먼은 형용사로 이 같은 조건을 가리키거나 여기에 맞추어진 인간 상황 혹은 변화 과정의 인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최원일=포스트휴머니즘은 '트랜스휴머니즘'과 겹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진보된 기술로 인한 인간능력 증강 혹은 향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사조다. 포스트휴먼 조건 일부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이 내포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찰성과는 때로 거리를 보이기도 한다. 국내외 학자는 첨단기술로 변형되거나 향상된 인간 신체와 능력이 인간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인간 본성과 존엄성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있다. 인간과 과학기술이 어떻게 공생해 가야 하는지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황치옥=통상 인간 기능 영역은 육체적, 감성적, 지성적 영역으로 구분되며 이에 더해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서는 지성을 넘어 인간만이 가지는 영적인 영역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많은 산업로봇이 인간의 여러 육체적 기능 영역을 대체하고 있다. AI 발전이 지성적 영역에서 선형적 문제를 넘어 비선형적 문제까지 해결하면서 인간의 로봇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향후 어떠한 직업이 살아남아 있을지 관심이 뜨겁다. 포스트휴머니즘이 화두인 이유다.
◇사회=AI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사회경제구조 변화도 불가피하다. 이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
◇장진호=AI나 로봇 등 기술 발전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 창출 혹은 기존 일자리 상실 및 경제적 격차 확대라는 상반된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에서 4차 산업혁명은 대중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디지털 민주주의를 낳을 수도 있지만, 정보 독점과 조작에 의한 감시사회 도래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경제에서는 산업 생태계 변화로 새로운 혁신과 생산성 증대가 일어나지만, 플랫폼 기업의 독과점 증대 등 우려가 동시에 존재한다. 또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정보 생산 민주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가짜 뉴스 범람과 정보 소비 편향이 커질 수 있다. 스마트한 사회에서 인간 사고와 판단 기능은 똑똑해진 기계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점차 온라인상 여론 형성자나 심지어 기계에게 미루거나 넘겨줄 수 있는 위험성도 상존한다.
◇최원일=인간과 로봇 관계는 인간을 위한 일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이 로봇과 관계에 익숙해질 때 성숙한 인간관계를 저해할 수도 있다. 인간 상호작용은 협력, 갈등, 배려, 공감 등 과정을 수반하고 훨씬 더 많은 인지적, 심리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 또 인간과 로봇과 관계는 인간관계에 대한 왜곡된 신념을 품게 해 성숙한 인간관계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과 로봇 관계가 조력자나 보호자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황치옥=AI가 완전히 성숙해 육체, 감성, 지성 모든 영역을 정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종교학 등에서 말하는 영적인 심층 영역이라고 말해지는 곳에서의 계시 혹은 신성이나 직관성이라고 말해지는 정신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문제를 모두 풀 수 있는 AI 알고리즘을 완성하고 그 알고리즘이 자가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비로소 진정한 AI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포스터휴머니즘 관점에서 AI와 인간 관계 설정에 대해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장진호=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스마트 격차나 로봇 격차, AI 격차, 데이터 격차 등을 줄이기 위한 '공공적인 제도와 인프라'를 잘 설계하고 구축해야 한다. 최근 거대하고 새로운 사회변화가 여러 가능성에 대한 진단 및 충분한 성찰적 논의와 병행해 추진돼야 새로운 위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거대한 변화 추세와 별개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별로 발생할 수 있는 구체적 변화를 탐색해야 한다.
◇최원일=인간과 비인간 경계가 무너지는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사람은 여전히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관계에서 그 중심은 항상 인간에게 있는 만큼 비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 삶이 더욱 건강해지고 물질적, 심리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삶에 도움을 주는 로봇이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관계 지향적 로봇 출현 및 이용이 현실화됐다고 볼 수 있다. 노인을 상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로봇처럼 감성로봇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로봇 신체에 감각을 부여하고 감성을 신체 반응으로 구현하면 인간 감성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갖는 로봇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황치옥=인간과 대결하는 AI를 강조하기보다는 인간 육체, 감성, 지능을 보완하는 관점에서 AI를 개발해야 한다. AI가 인간 존재 의식처럼 자아의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봇이 인체 감각과 감성까지 구현해내면 자신의 고통 방어의 기제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 자아의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구현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과 같은 로봇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불교의 유식론적 관점이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회=마지막으로 AI 사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장진호=사람들이 생각을 멈추고 지능을 가진 기계가 의사결정을 독점할 가능성에 대비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고 훈련 교육을 지속하고 강화해야 한다. 또 맹목적이고 돌진주의적인 변화'나 '변화에 눈을 감은 자기 위안'이라는 선택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 혁신에 기반을 둔 미래로의 전환'이라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최원일=로봇공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로봇은 단순히 인간 명령을 수행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구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일정 수준 능동성을 가진 존재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머리를 맞댈 때 인간과 비인간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수 있다. 비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황치옥=알파고와 이세돌 바둑 대국을 AI와 이세돌 대결이 아닌 AI를 활용하는 두 인간 바둑 기사 대결이 됐어야 했다. AI와 인간지능 대결 문화가 아닌 AI가 인간지능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AI 문화로 간다면 우리 미래는 밝다.
◇참석자
△장진호(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 연구분야 : 사회 변동론, 정치·경제 사회학 등)
△최원일(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 연구분야 : 인지정보처리, 인간-로봇 상호 작용 등)
△황치옥(GIST 기초교육학부 교수, 연구분야 : 과학 계산 등)
※사회=김한식 전자신문 부장
광주=김한식기자 h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