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걸음마' 단계 병원 기술 사업화

#미국 대형병원 메이요클리닉은 메이요클리닉 벤처스를 설립해 현재 130개가 넘는 기업을 창업 지원했다. 매일 두 개 이상 사업화 후보기술을 접수해 25%가량을 기술 사업화 한다. 기술이전 수입은 5400억원에 이른다. 미국 브링검여성병원과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이 출자해 설립한 파트너스헬스케어는 13개 소속 병원 기술 사업화를 위해 연구실과 기업에 투자한 돈만 2조원에 가깝다. 병원 기술 사업화에 투자해 이 회사 연간 매출은 12조원에 달한다.

Photo Image

병원이 바이오헬스 산업 요람으로 부상했다. 의사·연구자가 보유한 아이디어를 발굴해 사업화로 이어지게 해 의료 서비스 고도화와 수익 다각화를 추구한다. 우리나라 역시 4차 산업혁명 대응 전초기지로 병원이 주목받으면서 기술 사업화 열기가 무르익는다. 논문만 썼던 것에서 벗어나 특허출원·등록, 기술이전, 창업 등 실질적 성과를 거두는데 집중한다.

선진국과 비교해 우리나라 병원 기술 사업화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병원 설립 주체에 따라 적용법이 제각각이다. 기술 사업화 장애물로 작용한다. 병원 내부에서도 창업을 위한 재정·문화가 성숙돼야 한다. 기술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일어나는 병원이 바이오헬스 사업화 앵커기관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논문은 옛말, 수익에 눈뜬 의사

의사·연구자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 중 하나가 논문이다. 횟수를 포함해 얼마만큼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렸는지 평가한다. 병원과 의사 모두 변했다. 아이디어와 주장을 현실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술 사업화, 창업이 대표적이다.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고대의료원 등 대형병원 연간 특허등록 건수는 평균 150건이 넘는다. 해외 특허등록도 연평균 약 5개씩 꾸준히 발생한다. 작년부터 의사·연구자 창업도 병원별 1~2개 기업이 탄생했다.

박민수 연세의료원 산학협력단장은 “현재 병원 연구 트렌드는 논문만 써서 끝내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성과를 내는 것”이라면서 “의약품, 의료기기 등 다양한 기술을 이전하거나 상품으로 출시하려는 요구가 병원 경영진은 물론 의사·연구자 전체로 확산된다”고 말했다.

연세의료원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224건의 특허출원과 156건의 특허등록을 지원했다. 해외 특허등록도 6건이다. 기술 발굴, 마케팅, 기술이전, 사업화 전 주기 지원체계를 확립했다. 지난해 기술이전은 총 36건을 기록했다. 매년 10건 가까이 증가한다.

고대의료원은 기술지주회사 자회사로 의료기술지주회사를 설립했다. 국내병원 중 가장 많은 9개 기업이 창업했다. 의료기기, 신약, 진단키트 등 영역도 다양하다. 서울대병원은 작년 국내외 특허를 108건, 서울아산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도 각 66건과 180건 등록했다.

◇규제 속 갈길 먼 병원 사업화

의사·연구자 특허는 증가하지만 기술이전이나 사업화로 이어지는 사례는 절대 부족하다. 산학협력단, 연구자 개인이 보유한 특허 중 사업화로 이어지는 비중은 평균 5%가 안 된다. 특허 가치는 있지만 시장 가치는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전, 창업 정보가 부족하거나 의지가 약한 것도 원인이다.

조재형 아이쿱 대표(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의사·연구자가 보유한 특허 상당수가 시장 수요를 반영하지 못해 사업화 가능성이 낮다”면서 “기술 사업화는 특허 등록 수보다 기술이전이나 창업 등 실질적 성과가 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비교해 격차가 크다.

병원 내 창업은 더 심하다. 우리나라 병원 소속 의사·연구자가 창업한 기업은 50곳이 채 안 된다. 이마저도 연구중심병원 지원 통해 창업한 회사(34곳)가 대부분이다. 병원이 직접 투자한 자회사 형태 창업은 한 곳도 없다.

원인은 병원이 체계적으로 기술 사업화를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병원은 설립 주체에 따라 재단법인, 사회복지법인, 의료법인, 학교법인 산하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된다. 재단·사회복지법인은 국내법인 지분을 5% 이상 보유 못한다. 법인 창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료법인은 성실공익법인 인정을 받아야 자회사 설립이 가능하다. 성실공익법인은 국내에 2~3곳에 불과한데다 창업 가능 영역도 해외의료 수출 등 제한적이다.

학교법인 소속 병원은 산학협력단 내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해 자회사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이전, 창업 등으로 얻은 수익은 병원이 아니라 대학으로 간다. 병원에 재투자되는 구조가 불투명하다. 산학협력단 내 복수 기술지주회사 설립은 가능하다. 몇몇 대형병원에서 자체 기술지주회사 설립을 추진하지만 대학 반대에 부딪친다. 국내에서 병원 별도 기술지주회사를 둔 곳은 없다. 고대의료원 의료기술지주회사 역시 고려대 산학협력단 기술지주회사 자회사다.

대학병원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병원 자체 의료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지만, 대학에서 기존 기술지주회사가 있다는 이유로 설립을 완강히 반대한다”면서 “수익사업이 금지된 병원에서 유일하게 사업화 수익을 거둘 창구지만, 현재는 기회마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제도개선, 창업 문화 확산 절실

우리나라 병원은 진료 수익이 전체 매출 95% 이상 차지한다. 국내 병원 10곳 중 8곳이 적자에 허덕인다. 문재인 정부 들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급여화가 확대되면서 병원 수익도 점점 줄어든다. 미국·유럽 등 병원은 진료와 연구 수익이 6대 4까지 균형을 맞춘다. 우리나라도 기술사업화를 강화해 수익구조를 다변화하고 사업화 성과가 병원과 환자에게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병원 자회사, 기술지주회사 설립이 사실상 불가능하면서 근본적 제도 개선 목소리가 높다. 산학협력단처럼 병원을 위한 '산병협력단' 설립을 허용해 달라는 주장이다. 기술이전, 창업 등을 전담할 기구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자회사 설립까지 가능하다. 영리 목적으로 수익 축적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서 자회사로 수익을 창출하고 의료 서비스 고도화나 기술 사업화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오상철 고대의료원 산학협력단장은 “병원이나 대학에서 극소수 인원이 기술 사업화를 담당하면서 체계성이나 전문성이 떨어진다”면서 “기술 사업화로 발생한 수익 일부가 연구나 창업을 위한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병원 기술 사업화 중요성을 인지, 투자를 확대 중이다. 핵심은 연구중심병원이다. 연구 역량을 보유한 병원을 대상으로 진료와 연구 균형체제로 전환해 연구개발(R&D) 실용화를 촉진한다. 2013년 시작돼 현재 10개 병원이 지정됐다.

연구중심병원을 기술 사업화, 창업 성공모델로 만들어 확산한다. 이를 위해 작년부터 보건복지부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기술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공공연구기관에 연구중심병원을 포함하는 것을 논의 중이다. 연구중심병원도 대학처럼 기술지주회사 설립이 가능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병원은 산업, 기술 간 융합이 핵심인 4차 산업혁명 최전선에 위치한다”면서 “패러다임 대응을 위해 기술 사업화가 중요한 만큼 이를 지원, 전담할 기구가 제도적으로 설립 가능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과 함께 창업을 장려, 지원하는 문화정착도 요구된다. 병원 내 창업은 대부분 의사 개인이다. 기술·행정·재무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하루에 100여명에 가까운 외래환자를 보는 것까지 포함하면 업무 부담이 크다. 내부에서 본연 업무를 소홀히 한다는 편견도 있어 창업이 쉽지 않다.

조 대표는 “의사는 진료현장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어 사업화 기회 발굴이 용이하다”면서 “병원이나 정부가 성급하게 성과를 확보하는 것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행정·재무적 지원을 한다면 창업 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