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쏠림 현상은 '우려'를 넘어 '위기'로 불릴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반도체가 무너지면 우리 주식시장 4분의 1, 수출 5분의 1이 날아간다. 반도체 시장이 꺾이는 순간 우리 경제는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직접 '반도체 착시'를 언급하며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호황 지속은 '당분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 외 주력제품 수출 경쟁력 강화, 반도체를 대체할 신산업 발굴은 중장기 과제가 아닌 당장 눈앞에 닥친 숙제라는 지적이다.
◇심각한 쏠림…삼성전자·SK하이닉스 빠져도 SW·금융에 육박하는 반도체 시총
우리 산업 반도체 쏠림 현상은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기업을 들여다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4월 글로벌 시가총액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집계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상위 500개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금융 업종이었다.
지난해 한국거래소가 집계한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0사 업종별 분포 및 시가총액 비중 분석 결과에서도 상위 100개사 가운데 19개사는 금융서비스업이 차지했다. 이 밖에도 제약(13개), 소비재(8개), 석유(7개), 소프트웨어(6개), 식음료(6개), 통신(5개) 등 업종 분포도 24종으로 다양했다.
올해 들어 새롭게 상위 100개사에 진입한 기업 업종도 다양하다. 다우듀퐁, 엔비디아, 애보트,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브리스톨메이어 등 미국 기업을 비롯해 귀주마오타이, 중국초상은행(중국), 나스퍼스(남아공), 산탄데르뱅크(스페인), BNP파리바(프랑스) 등이 진입했다. 화학, 금융서비스, 의료기기, 음식료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반면 한국 증시에서는 삼성전자가 수년째 굳건히 시가총액 상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2년부터 시가총액이 꾸준히 증가하던 SK하이닉스는 지난해부터 시가총액 2위로 올라서며 국내 증시 반도체 쏠림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하더라도 반도체 관련 업종이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삼성전자 보통주와 우선주,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을 제외한 반도체 관련 업종의 시가총액은 8일 현재 약 79조5700억원에 이른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소프트웨어(SW) 및 서비스업체의 시가총액 104조2200억원, 전체 은행 및 지주회사 시가총액 86조8300억원 등 여타 국가 증시의 시가총액 상위를 차지하는 업종 전체 규모에 육박한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정보기술(IT) 섹터가 흔들리면 코스피 지수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그나마 바이오주와 최근 남북관계 훈풍에 따른 자본재가 버텨주고 있지만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중심 한국 경제, 20%는 반도체
수출 부문에서도 반도체 쏠림 현상은 그대로 드러난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나들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은 1956년 무역통계 작성 이래 61년 만에 사상 최대 실적인 5739억달러(전년 대비 15.8% 증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기록적 수치 이면에는 반도체 쏠림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13대 수출 주력품목 중 9개 품목 수출이 증가했는데 이 가운데 6개 품목(반도체, 기계, 석화, 석유제품, 선박, 철강, 디스플레이, 컴퓨터, 자동차)은 두 자릿수 증가를 기록했다.
이 중에서도 반도체 수출 실적은 눈에 띄게 좋았다. 반도체는 단일 품목 사상 최초로 연간 수출액 900억달러를 돌파(979억4000만달러)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은 반도체 57.4%, 석유제품 31.7%, 선박 23.6%, 석유화학 23.5% 등으로 반도체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17%가 넘었다.
올해 들어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올해 5월 수출은 509억8000만달러로 역대 5위 실적을 기록했는데, 반도체(108억5000만달러, 전년 동월 대비 44.5% 증가)는 올해 3월(108억달러)에 이어 100억달러를 재돌파하며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경신했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1%를 넘었다.
정부도 반도체 쏠림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김 부총리는 최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반도체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착시문제, 청년일자리 문제를 비롯해 제조업 가동률이 오랫동안 저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가 차지하는 수출, 투자 비중은 비대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위기는 경제 위기…대응 강화해야
우리 경제는 내수가 작아 주로 수출로 지탱하는 구조다. 그런데 수출 20%가 반도체라는 단일 품목에 의존한다. 결국 반도체 위기는 수출 위기로, 이는 곧 우리 경제 전반 위기로 번질 수 있다.
우리 수출은 아직 양호한 모습이라는 게 전문가 예측이다. 반도체 시장도 당분간 호황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호황이 언제까지 갈지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린다. 반도체 시장이 빨리 위축되면 우리 경제도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지난해 3년 만에 회복한 '3%대 성장률'도 반도체 수출 증가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미 각종 연구기관은 올해와 내년 3%대 성장률 달성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나마 이들이 제시한 수치는 반도체 시장이 지금과 같은 호황을 지속했을 때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와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9%, 2.7%로 각각 전망하면서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거나 중국 경제 추격으로 주력 수출품목 경쟁력이 약화되는 속도가 가속화되면 우리 경제는 예상을 하회하는 성장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업계는 반도체 외 주력 수출품목 경쟁력 강화, 반도체를 대체할 '포스트 반도체' 발굴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혁신성장에 한층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문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그동안 혁신성장 정책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측면이 있다”며 “지금은 부처·실국을 막론하고 혁신성장 속도를 내는데 역량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