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광다이오드(LED), 태양광, 액정표시장치(LCD)….
한국이 중국에 주도권을 내준 대표 산업군이다. 국내 굴지의 여러 기업이 초창기 이들 산업을 '신수종'으로 밀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현지 업체가 지속 공급을 늘리자 한국 기업은 하나 둘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극심한 가격 하락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LCD는 LED, 태양광과 달리 기술 진입장벽이 높았다. 중국은 한국 전문가를 영입해 공정 노하우를 '카피'하는 방법으로 성장했다. LED 등과 비교해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기술력에선 중국과 한국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출하량 측면에선 이미 중국이 한국을 뛰어넘었다.
반도체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이미 중국이 한국을 앞섰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중국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업계의 지난해 매출 규모가 2006억위안(약 32조80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전년 대비 무려 22% 성장한 수치다. 올해도 20% 이상 고성장을 예상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을 제외한 국내 팹리스 반도체 업계의 매출 규모는 2조원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전부터 매출 정체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사업 부문인 시스템LSI의 연매출(7조원 추정)을 추가하더라도 중국과의 격차는 적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팹리스 업계의 매출이 올해도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격차는 20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메모리 분야도 중국의 추격 위험에 노출돼 있다. 정부의 대규모 자금을 수혈 받은 현지 업체는 조만간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에 건설하고 있는 현지 업체 메모리반도체 제조 시설은 D램 2개, 낸드플래시 1개 등 3곳이다. 칭화유니그룹 소유의 양쯔강메모리테크놀로지컴퍼니(YMTC)가 후베이성 우한에서 3D 낸드플래시, 이노트론(시노킹테크놀러지→루이리IC→이노트론으로 사명 변경)이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D램, 푸젠진화반도체(JHICC)가 푸젠성 진장에서 D램을 각각 생산한다. 생산 시작 시점은 모두 올 하반기로 잡았다. 칭화유니그룹은 2019년 난징에 추가로 D램과 낸드플래시 공용 생산 공장을 지을 예정이다.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경우 가격이 추가로 하락해 4년 뒤에는 국내 기업 매출이 약 8조원 축소될 것이라는 연구 보고서도 나와 있다.
일각에선 특허 이슈와 인력 수급, 높은 기술 난도 때문에 중국의 메모리 산업 진출이 예상보다 더디게 흘러갈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우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지난 수십년간 쌓은 메모리 핵심 특허를 회피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미 마이크론은 푸젠진화반도체가 자사 메모리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푸젠진화반도체의 합작사로 들어온 대만 UMC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중국 현지에서 맞소송을 걸었다. 이 같은 미중 업체간 싸움은 향후 더 큰 무역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만명의 필요 인력을 어떻게 수급할 것인가도 관건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LED와 태양광은 물론, LCD보다도 기술 구현이 어렵다. 과거와 같은 치킨게임 형태로 경쟁이 시작될 경우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수년간 적자만 보다 망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전문가는 “넘어야할 장벽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정부가 무한대의 자금을 대고, 자국 내 판매가 어느 정도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시장 진입은 시간 문제”라면서 “중국은 설계, 생산 기술을 완벽하게 확보하는 순간 LED, 태양광, LCD 패널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격 덤핑으로 시장을 교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보다 더 우울한 전망도 있다. 메모리 전문 시장조사업체 오브젝티브애널리시스 대표이사 겸 애널리스트인 짐 핸디는 올해 초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미콘코리아 2018 기자회견에서 중국 업체가 시장에 뛰어들면 공급과잉이 생기고 현재 D램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업체간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그는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D램 시장에서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장기로 이 같은 구조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누가될지 모르겠지만 3개 업체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고 두 곳만 남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