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구송(口誦)과 금융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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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송(口誦·소리 내어 외움)으로만 문과 고시를 치르게 하니 글의 뜻을 전혀 깨치지 못합니다.”

조선 숙종 10년인 1684년 9월 11일 우의정 남구만은 암기 왕만 뽑게 되는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꼬집고 개혁을 역설한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로 유명한 조선 후기 문장가이기도 하다.

남구만에 따르면 과거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지만 막상 서찰이 와도 한문으로 답장 한 줄을 쓰지 못하는 유생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수험생이 한문 원전에 한글로 토를 단 책을 달달 외워서 과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울려 퍼지던 글 읽는 소리는 학문의 이치를 깨닫기보다 과거 합격을 위한 단순 암기 훈련인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30여년 전에 남구만이 개탄한 암기식 중심 공부의 폐단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광복 이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교육 개혁이 있었지만 여전히 주입식·암기식 교육이 성행하고 있다. 이런 단순 암기식 학습은 금융이나 부동산 투자 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외에 통용되는 투자 이론이나 격언, 역사 인물의 명언을 천자문 외우듯 기계식으로 암기한다. 그리고 현실에 그대로 맹목 대입을 하려 한다.

성공한 자산 관리를 위해선 공식이나 격언을 외우기보다 스스로 생각(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암기 왕이 투자 왕이 되지는 않는다. 셈법보다 생각법이 더 중요하다.

최근 한 TV에서 '초원의 청소부' 하이에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볼품없이 생겼지만 뭉쳐서 암사자를 쫓아내고 먹이를 빼앗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그런 하이에나도 힘센 한 마리의 수사자 앞에선 줄행랑을 쳤다. 그런데 하이에나는 수사자의 공격에 떼를 짓지 않고 여러 갈래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다. 그래야 한 마리가 희생되더라도 나머지는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종족 보전을 위한 위험 관리 본능이다. 하이에나 생존 본능에서 보듯 일반 자산 관리는 집중보다 분산이 낫다. 한 종목에 집중 투자를 하다가 하루아침에 쪽박을 찬 투자자가 주위에 어디 한두 명인가. 그래서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라는 격언을 금융 자산 투자 때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분산 투자를 하기만 하면 능사일까. 가치투자자들은 대체로 분산 투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는 아내가 40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워런 버핏은 분산 투자의 함정을 이같이 비판한다. 그래서 분산은 무지한 자들을 위한 위험 회피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벤저민 그레이엄 역시 “달걀을 모두 한 바구니에 담은 뒤 지켜보라”고 했다. 분산 투자가 과도하면 관리 소홀로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위험을 낮추는 분산 투자의 가치를 망각하면 안 된다. 필자 생각으로 금융 자산은 상품, 업종, 지역, 시기별 분산을 추구하되 스스로 '관리 가능한 분산'이어야 한다. 관리하지 못하는 분산은 오히려 위험을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어떨까? 부동산에 분산 투자 기법을 적용하기란 무리였다. 부동산은 분산 투자보다 압축 투자가 더 바람직하다.

우선 부동산을 사기 위해서는 목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큰 부자가 아닌 이상 분산 투자는 엄두를 낼 수 없다. 분산 투자라는 공식에 얽매일 경우 싼 비지떡을 여러 개 사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셈이다. 또 부동산은 관리에 번거로움이 생긴다. 부동산은 여러 곳에 벌려 놓으면 방치되기 쉽다. 예를 들어 부산 거주자가 서울·울산·인천·대전에 분산 투자할 경우 수시로 바뀌는 세입자 관리, 수선, 임대료 연체 문제로 골치를 썩일 것이다.

부동산은 음식으로 치면 이것저것 나오는 정식 메뉴보다 깔끔한 단품 요리가 좋다. 다만 흔하지는 않지만 아파트를 여러 채 매수〃매도할 때에는 위험을 낮추기 위해 분산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부동산도 '시기 분산'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상품과 지역에서는 집중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박원갑 KB WM Star자문단 수석전문위원 land2233@kbf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