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부품소재 산업은 지난 20여년 동안 눈부시게 성장했다. 만성 적자로 우리 경제 취약점으로 지목되던 산업이었지만 1997년 흑자 전환에 이어 2014년 사상 처음 무역흑자 1000억달러를 기록했다. 또 2015년에 이어 2016년도 3년 연속 1000억달러 돌파가 예상될 만큼 부품소재는 우리 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축배를 들 수만은 없다. 상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나 인사이드(China Inside)`로 불리는 중국의 자국산 부품 사용 장려와 가공무역 제한정책 등으로 우리나라 부품소재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대중국 수출이 둔화되고 있다. 실제로 2016년 1월부터 9월까지 대중국 수출액은 604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3.2%가 감소했다. 베트남 등 아세안 수출이 증가해도 중국 감소분 전체를 보완하지 못해 지난해 1~9월까지 총수출 규모도 전년 대비 6.9% 줄었다.
부품과 달리 소재 경쟁력은 취약하다는 게 문제다. 무역흑자 80%가 부품인 반면에 소재는 20%에 불과하다. `새로운 소재 없이는 새로운 제품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재가 모든 산업의 기반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소재 균형발전이 중요하지만 미흡한 실정이다. 오히려 일본은 소재 파워로 세계 시장을 독주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격과 물량을 앞세운 중국에 추격당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연구개발(R&D)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폐쇄적인 R&D가 아닌 대·중·소, 산·학·연을 아우르는 개방적 협력을 강조했다.
이창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부품소재는 장기간의 R&D가 필요한데 우리 업체 상당수가 아직 규모가 영세해 여력이 부족하다”며 “이런 약점을 조기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수인력이 있는 대학과 실질적 산학협력을 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세계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선도한 일본을 제치고 1위 국가로 올라섰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에서 중소형과 대형 모두 가장 성공적으로 상용화했다. 그 힘은 역시 부단한 R&D에 있다. 일본은 OLED 개발을 중도 포기했지만 한국 기업은 이를 상용화해냈다. 그 결과 삼성디스플레이는 세계 중소형 OLED 시장 96%를 장악했고 LG디스플레이는 세계 유일하게 8세대 대형 OLED를 양산하는 독보적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속적 R&D가 중요한 이유다.
이덕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본부장은 “우리나라는 2001년 소재부품특별법으로 대일무역 적자를 개선하고 그 효과에 10년 한시적이던 법을 10년 더 연장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산을 투입했으니까 이제는 되지 않았냐는 인식이 있다”며 “그러나 부품소재는 지속성이 중요하고, 사실 우리나라는 보다 더 육성하고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장기적 R&D는 단순히 부품소재 개발이 아닌 미래 먹거리와도 직결된다. 최근 미국 백악관은 국가전략컴퓨팅계획(NSCI:National Strategic Computing Initiative)에 무어의 이론을 지속시키기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향후 15년간 컴퓨팅 연산 성능을 높이고 전력 소모를 낮추는 것을 목표로 광범위한 반도체 R&D 추진안이 담겼다.
최리노 인하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한국도 미국처럼 하루 빨리 이런 분야 R&D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단순히 몇% 전력소모량 절감 등 성과만으로는 안 된다”면서 “장기 기술개발 로드맵을 세워놓고 지금 주력 제품보다 전력 소모량을 1000분의 1 수준까지 줄여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반도체 산업계를 지배해온 CMOS(Complementary Metal-Oxide Semiconductor) 대체 기술이나 실리콘을 대신할 화합물 기반 재료 개발, 빛을 활용한 실리콘포토닉스 기술 등 현재의 판을 뒤집으면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술 개발에 각국이 움직이고 있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국가 차원에서 장기적이면서도 정교한 R&D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면서 “CMOS 소자 기술을 연장시키는 단기 R&D에 그치면 훗날 주도권을 빼앗겨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중휘 인천대 임베디드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신소자, 공정, 소재, 설계 분야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후발주자인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성장에 힘입어 국내 부품소재 산업도 체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수직계열화와 편중은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A사의 납품 업체는 B사와 거래에 제한이 있는 등 아직도 대기업의 힘이 너무 커 중소 부품소재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가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청원 전자부품연구원장은 “국내 부품소재 기업은 규모가 작고 연구개발 인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좋은 기술을 개발하거나 이전해도 이를 상용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기반과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개방적 협력으로 요약된다. 경쟁력 있는 디스플레이를 생산하려면 관련 설계와 공정 기술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 등 후방 기술까지 모두 뒷받침돼야 한다. 대기업이 패널을 양산하기까지 수많은 중소 후방기업의 기술개발 노력이 필수다. 정부가 꾸준히 후방 생태계가 성장할 수 있는 지원을 뒷받침해야 하는 이유다.
이창희 교수는 “세계 1등 부품소재를 개발하려면 대학, 연구소와 실질적인 산학협력이 필수적이고 특히 정부 지원을 받는 공공연구소가 더 적극적으로 중소 부품소재 기업과 협력하도록 하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