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인 미디어]저주인가 축복인가···`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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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구의 한 남자. 잠복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집에 돌아온다. 물을 한 잔 마시고 턱을 닦는데, 이상하게 집이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1층을 둘러본다. 그때 발밑이 미끄러지면서 그는 넘어진다. 그보다 더 몸집이 큰 처남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헤링본 무늬 마룻바닥을 온통 적셨다. 남자는 2층으로 치달린다. 방문을 연다. 아무도 없다. 아니다, 있다.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누워있다. 아내는 죽었다. 그날 밤, 남자는 소중한 것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경찰이 수사를 하지만 범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2년 후, 한 남자가 자수한다. 자기가 그의 가족을 죽였다고. 그런데 거구의 남자는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추리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다. 가족을 잃은 거구의 남자는 한 번 본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의 기억을 짜맞췄을 때 자수한 남자는 범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기억`은 예술작품의 단골 소재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 즉 `기록`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는 기록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은 1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 몸에 사건을 기록한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추억에 관한 영화다. 수진(손예진)은 건망증이 심하다. 메멘토처럼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이. 하지만 메멘토와 다른 점은, 기록이 아니라 추억이 사라진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 보기 거북한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둘째 치고 기억이 많아지면 정보량에 짓눌린 나머지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망각 능력이 축복처럼 느껴질 정도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기억력은 사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 번 본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한 번 들은 음악을 모조리 기억한다면? 한 번 둘러본 초원의 모습과 색감까지 모두 머릿속에 담아둔다면? 엄청난 천재의 탄생이다. 이런 자폐아적 증상을 특히 `서번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영화 굿윌헌팅에서 윌(맷 데이먼)이 보여준 엄청난 암기력은 서번트 증후군 덕분이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모양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기억력과 암기력은 뇌의 다른 영역이 담당한다고 한다. 같이 걷던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여섯개인지 일곱개인지까지 기억하는 것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모조리 암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라는 소리다. 추리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로 돌아가 보자. 그의 사진과 같은 정밀한 기억력은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삶의 너무 많은 내용을 기억하는 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장면을 열 시간, 스무 시간 찍은 영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싱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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