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아메리카 대륙 정복 시절 유럽인은 원주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유럽인의 총과 칼에 죽은 원주민도 많았지만 유럽에서 넘어간 각종 전염병은 아메리카 대륙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천연두가 덮친 멕시코는 180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생존자의 3분의 2가 또다시 홍역으로 죽었다. 아메리카 주민들에게는 이 병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어 한번 병이 돌자 걷잡을 수 없이 퍼졌던 것이다.
일리노이 대학 연구진은 이같은 결과가 살아남은 원주민의 면역시스템 뿐만 아니라 유전자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면역시스템은 사람의 일생동안 외부 환경에 적응해 만들어지고 발현된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붙어 공격하는 항체는 과거 침입자를 `기억`한다. 후속 감염에 재빨리 대응하기 위해서다.
다른 환경에 사는 사람은 다른 항체를 보유한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은 가축을 접할 기회가 많아 천연두와 홍역 등에 많이 노출돼 면역시스템은 이에 맞게 발전했다. 연구진은 유전자도 비슷하게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리고 유전자 조사를 실시했다.
연구진은 캐나다 프린스루퍼트하버 지역 원주민인 `침시안`(Tsimshian)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 500~6000년전 25명의 침시안 유골 유전자를 검사했다. 유골 대부분은 유럽인이 지역에 진출하기 바로 직전인 1700년대 유골이었다.
연구진은 유전자 분석으로 면역시스템 관련 유전자를 검사했다. 현재 생존한 침시안 원주민 25명도 분석해 유전자 차이를 비교 했다. 비교결과 면역과 관련된 유전자 HLA-DQA1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 유전자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로부터 건강한 세포를 골라내는 단백질를 만들어내는 유전자다.
과거 침시안의 DNA에는 이 유전자가 100% 발견됐다. 그러나 현대 원주민에게는 36%만 발견됐다. 과거 침시안 원주민이 천연두나 홍역에 취약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대륙을 휩쓴 질병에 따른 결과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유럽 전염병이 아메리카 대륙의 질병 풍경을 바꿔놓으면서 유전자에도 흔적을 남긴 것이다.
연구진은 과거 원주민과 현재 원주민의 유전자 차이를 분석해 유전자가 급격히 바뀐 시점이 175년전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당시는 천연두 전염병이 미 대륙을 휩쓸던 시점이다. 당시 이 지역 인구의 80%가 전염병으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HLA-DQA1 유전자를 가진 원주민이 집중적으로 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아메리카 대륙 다른 지역 원주민은 유럽인과 다른 형태로 접촉했다”며 “이번 연구결과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특별한 유전적 결과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